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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넴

​연례행사

 푹푹 찌는 7월의 어느 날, 서부서 안의 모든 선풍기가 탈탈탈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하도 돌리는 바람에 모터가 열을 받은 건지, 원체 날씨가 더워 그런 건지 선풍기에선 더운 바람이 나왔다. 부채질을 하던 동철이 성질을 내며 서류철을 내던졌다. 강력계 형사들도 더위에 지쳐 혀를 내밀고 헥헥 댔다. 담뱃불도 더울 지경이라 재떨이가 깨끗했다. 물을 마시러 나온 동철이 태주를 보았다. 언제나처럼 목까지 잠근 셔츠 단추와 넥타이가 보기만 해도 답답했다. 그것도 동철이 보기 갑갑하다며 성을 내서 자켓을 벗은 것이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닌데.’
 동철이 물을 마시며 3반을 돌아보았다. 서류정리에 여념이 없는 나영과 신고 접수 중인 남식, 불량한 자세로 전화를 받는 용기는 동철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했다. 태주가 고개를 들어 동철과 눈을 마주쳤다. 동철은 헛기침을 하며 물만 마셨다. 태주는 동철을 위아래 훑어본 뒤 하던 일에 집중했다.
 ‘저 새끼가 상관을 훑어보기나 하고.’
 동철이 씨근거렸다. 하지만 참았다. 태주 빼고 3반에게 할 얘기가 있는데 그 전에 들키면 안됐다.

 “갑자기 무슨 일이에요, 형님.”
 “저 뭐 잘못했습니까?” 
 오늘따라 망부석처럼 자리를 지킨 태주 때문에 타이밍을 잡기가 힘들었다. 태주가 화장실을 간 틈에 세명을 계장실로 불렀는데 둘은 찔리는 게 있는지 이 모양이었다. 나영은 동철에게 미리 들은 게 있어 블라인드를 내렸다.

 “서울놈 돌아오기 전에 빨리 얘기할게. 윤순경…… 아니, 윤경장이 설명해.”
 나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8월 31일에 반장님 생일이신데 계장님이 깜짝 선물을 하면 어떻겠냐고 하셔서요.”
 그 말을 들은 용기와 남식의 표정이 대조적이었다.

 “형님, 아직 8월도 안됐습니다. 뭘 벌써부터 준비해요.”
 “그날 반장님 생신이에요? 와 전 까맣게 몰랐어요! 그래서 뭐하면 돼요?”

 “너흰 선택권이 없어. 내가 하겠다고 하면 하는 거야. 윤경장은 이미 나랑 한배를 탔고.” 
 나영은 결의에 찬 얼굴이었다. 용기는 투덜대다가 동철의 험악한 표정에 머리를 긁었다.
 “깜짝 선물이라고 하면 그런 거 어때요. 당일까지 매몰차게 대하다가 사택 가서 몰래 잔치 여는 거죠.”
 “기각이요.”
 “뭐?”
 동철의 주먹보다 나영이 빨랐다. 용기는 얻어맞은 머리를 감싸며 나영을 노려보았다.

 “왜 기각인데?”
 “이형사님은 이제까지 반장님 괴롭혀 놓고 생신때도 또 그러고 싶어요?”
 남식의 똑똑한 지적에 나영이 만족했다.
 “그것도 있고, 상대가 깜짝 놀라는 모습을 원한다고 도리어 상대를 괴롭히고 상처 입히는 행동은 반대해요. 그건 그냥 자기만족에 불과하거든요. 사실 저희 이렇게 모이는 것도 반장님 아시면 섭섭해하실 거예요.”
 “그 양반이?”
 동철이 끼어들었다.
 “나도 윤경장이랑 같은 생각이야. 그리고 남식이 말 잘했어.”
 남식이 헤헤 웃었다. 용기의 손바닥이 남식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그럼 뭐, 다른 수 있습니까?”
 나영이 동철을 바라보며 손을 들었다. 안과장 사건 이후 가장 먼저 직급이 올라간 나영은 과거보다 발언권이 강해졌다. 그녀 스스로 마음먹은 것도 있으리라.
 “무리해서 놀래키려고 하는 것보다 사소하게 챙겨주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반장님이 좋아하실 만한 걸 선물하는 거죠.”
 “좋아할 만한 거?”
 그런 걸 어떻게 아냐고 용기가 투덜댔다.
 “관찰이죠.”
 “관찰? 뭐 보면 딱 나와?”
 나영이 친절하게 설명했다. 서늘한 나영의 미소에 남식이 움츠러들었다.

 “반장님은 정장을 즐겨 입으시고 구두대신 운동화를 신으세요. 상대가 입는 옷차림을 보고 잘 어울리겠다 싶은 걸 사다주는 것도 좋은 방법이에요.” 
용기가 코를 후볐다.
 “선물은 내가 좋은 거 해다 주면 돼지.”
 “에이, 이형사님은 제가 김치 좋아한다고 생일선물로 김치 가져다주면 좋아요?”
 “생일 선물로 김치가 뭐냐, 싸대기 처맞을라고.”
 “그러니까요.”
 “그리고 반장님은 생신인데 왜 나는 생일이야?”
 더 두면 싸울 것 같아 동철이 말렸다.

 “내 생각엔 한태주 잘 안 먹어서 식사도 좀 챙겨줘야 할 거 같아. 용기 너 어머니 생신 때 미역국 기가 막히게 끓여드린다고 맨날 자랑 했잖아.”
 용기가 왜 그 얘길 지금 하냐며 펄쩍 뛰었지만 동철의 단호한 표정과 나영의 싸늘한 눈빛, 남식의 기대 어린 눈망울에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전 미역국 끓이고 선물로 넥타이 고급진 걸로 하나 알아볼게요. 남식이 말마따나 제가 그동안 한 짓도 있고 양길수 사건 때 진 빚도 있으니.”
 동철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래, 소고기 팍팍 넣어서.”
 알았다는 용기의 대답에 손뼉을 쳤다.
 “그러면 이렇게 하자고. 미역국은 해결했으니 나머지 음식들 하나씩이랑 선물 준비해서 당일에 한태주 집에서 모여. 케이키도 내가 사갈 테니까.”
 케이키가 아니라 케이크라며 용기가 나무라는 걸 무시했다. 나영과 남식이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참 그리고 음식에 돼지고기는 빼라. 한태주 돼지고기 못 먹는 댄다.”
 “그걸 계장님이 어떻게 아세요?”
 “지가 말하던데?”
 “그래서 회식가면 죄다 닭이었구만.”
 용기가 중얼거렸다. 동철이 쓰읍하고 눈을 부라리자 용기는 계장실을 뛰어나갔다.
 “생일 선물 안 겹치게 정보 공유하고!”
 “네. 계장님.”
 “예!”
 나영과 남식이 꾸벅 인사하고 계장실을 나갔다.

 “뭘 안 겹치게 공유해요?”
 “으악!”
 갑자기 나타난 태주에 나영이 비명을 질렀다. 손에 쥔 볼펜이 태주의 볼을 찔렀다.
 “죄송합니다, 반장님.”
 “아니에요. 놀라게 해서 미안해요. 근데 뭘……”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반장님 커피 드실래요?”
 태주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윤경장이 왜 커피를 타요. 제가 알아서 마실 게요.”
 “아니에요, 저도 마시고 싶어서 그래요!”
 나영이 탕비실로 뛰어갔다. 동철이 블라인드를 올리며 태주를 의뭉스럽게 쳐다보았다. 동철이 미스윤이라고 부르며 커피 심부름을 시킨 것도 이젠 옛일이었다. 태주는 볼을 매만지며 동철의 시선을 외면했다.

 그 이후로 넷은 태주가 자리를 비울 때마다 공유시간을 가졌다. 부적을 맞추려다가 본인이 안 오면 효과가 없다고 퇴짜맞았다는 남식은 동철과 용기에게도 뒤통수를 맞았다.
 “아 왜요! 부적이 어때서요!”
 “나영이 넌 뭐하기로 했냐?”
 용기가 건들거렸다.
 “요리는 전 좀 부칠 거구요. 선물은 비밀로 하겠습니다.”
 “그런 게 어딨어!”
 “안 겹칠 자신 있으니까 걱정 마세요.”
 “그래, 뭐 윤경장이 알아서 하겠지. 나는 요리는 아직인데 선물은 여름옷 한 벌이랑 운동화 하려고 그런다.”
 눈물을 찔끔 흘린 남식이 입을 열었다.

 “저는 요리는 아무래도 못 할 거 같아서 과일 좀 사가려고요.”
 “그래 뭐, 뭐든 가져오는 게 낫지.”
 “근데 저희 반장님 생신날에 몇 시에 모여요?”
 
 남식의 말에 정적이 흘렀다. 생일까지 남은 시간 약 이주일. 태주가 그날 시간이 되는지 안되는지 물어보지 않았다. 나영이 애써 웃어 보였다.
 
 “괜찮을 거예요. 반장님이 약속 잡고 다니시는 분도 아니고.”
 “그거야 그런데…… 그러면 그날 회식이라고 할까?”
 용기가 물었다.
 “좀 이르지 않을까요? 날짜가 날짜인데 지금부터 회식한다고 하면 의심할 텐데.”
 동철이 코를 찡그렸다. 맞는 말이었다.
 “아니면 제가 일주일 전쯤에 반장님께 여쭤볼게요.”
 
 일주일 전이라니, 나영은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물어봐도 태주가 약속이 없을 거라는 걸 확신했다. 태주가 타인과 어울리지 않는 성격이라는 걸 서부서 모두가 알았지만 나영의 평가는 냉정할 정도였다. 동철이 일단 생각해 보자며 셋을 내보냈다.

 태주는 동철과 3반이 자신 몰래 뭔가 한다는 걸 알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따돌림당하는 데는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졌다. 하지만 지금은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나영에게 무슨 일 있냐고 물어봤을 때 얼버무리던 모습이 생각나 웃음지었다. 완벽한 거짓말을 하는 대신 커피 타드리겠다며 당황하던 그 동그란 눈은 나쁜 일을 숨기는 눈이 아니었다. 자신을 조심스레 살피다 눈이 마주치면 화들짝 놀라는 남식도, 점심을 먹고 나면 종종 껌을 건네던 용기도 마찬가지였다. 일전에 서랍에 껌을 붙인 걸 사과하려는 행동이겠지. 무엇보다 동철의 기류가 가장 결정적이었다. 우두머리인 만큼 그의 기분은 강력계 분위기의 중심이었다. 다른 형사들이 실수를 하거나 수틀리는 일이 있으면 서류를 책상에 내려치며 화내는 그였다. 그런 동철이 유순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조용했다. 물론 언제 터질지 모르는 미친 멧돼지를 건드리는 바보는 없었다. 태주는 동철의 눈치를 보지 않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한달 동안의 동철을 보아 나쁜 일이 있는 건 아니었다. 확신할 수 있었다.

 3반의 태도보다 신경쓰이는 건 따로 있었다. 씻고 나온 태주가 달력을 보았다. 아무런 표시도 안 된 달력을 보며 무거운 한숨을 쉬었다.

 느릿느릿 이불을 깔았다. 동철이 올 때도 쓰지 않던 오래된 이불을 모두 깔았다. 덮는 이불도 두 겹씩 펼쳤다.

 

 머리끝까지 이불을 덮고 자던 태주의 몸이 떨렸다. 아, 역시. 올게 오고 말았구나. 며칠 전부터 찌뿌둥하더니 지금은 온몸이 쑤셨다. 체중이 실린 팔이 아파 반대쪽으로 몸을 돌렸지만 마찬가지였다. 이불은 무겁기만 할 뿐 전혀 따뜻하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여름에 연탄을 때는 꼴을 보면 동철이 뭐라고 할지 뻔했다. 먼저 뒤통수부터 갈기겠지.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최대한 따뜻하게 해서 땀을 빼는 것이 여태까지 해온 방법 중 가장 효과적인 치료법이었다. 

 시계를 보니 새벽 2시를 훌쩍 넘었다. 식은땀으로 젖은 머리를 쓸어올렸다.

 며칠 전 나영이 오늘 시간 있냐며 물어왔다. 태주는 날짜를 확인하고는 거절했었다. 실망보다 당황함이 가득하던 그녀의 표정을 살필 정신이 없었다. 88년도를 선택하고 한동안 괜찮았는데, 자신을 괴롭히던 지독한 연례행사가 다가오는 걸 몸으로 알았다.

 태주는 약속을 거절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상태면 잠은 고사하고 누워있는 것조차 힘겨웠다. 약을 먹어도 소용이 없었기에 그저 시간이 가기만 비는 수밖에 없었다. 

 

 눈을 찌르는 아침 햇살에 든 생각은 하나였다.
 ‘최악이야.’ 
 낫기는커녕 근육 하나하나가 비명을 질렀다. 눈은 누가 모래를 집어넣은 듯이 꺼끌꺼끌했다. 태주는 걸음마를 시작한 아기 사슴처럼 비틀거렸다.


 “다들 잊지 않고 준비했지?”
 “어떻게 잊어요, 형님이 매일 이르집어 주셨는데.” 
 사택에 가면 바로 조리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며 용기와 나영이 대답했다. 남식도 과일바구니 예약 걸어 놨다고 했다.
 “그래.”
 태주가 나영의 약속을 거절한 건 예상 밖이었지만 회식이라고 하면 빠지지는 못할 터였다.

 “반장님 오셨어요!”
 남식이 쪼르르 자리로 돌아갔다. 의심받는 행동을 하는 남식이 답답했지만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와, 왔어? 오.늘.좀.늦.었.네.”
 용기가 동철을 똥 씹은 표정으로 보았다. 동철이 머리를 긁다가 용기의 표정에 손을 올렸다.
 “반장님 좋은 아침입니다!”
 용기가 잽싸게 인사했다. 태주가 인사를 받았다.

 점심이 가까운 시각, 계장실에서 손톱을 깎던 동철이 태주를 힐끔 쳐다보았다. 처음엔 자길 빼고 수근거리는 것이 기분이 나빴나 싶었다. 하지만 인간관계에 섭섭한 걸 드러내는 한태주가 아니었다. 용기나 남식이 여지라도 줬나 살폈다. 쉭쉭 소리를 내며 용기와 남식을 불렀다. 태주를 고갯짓하며 눈썹을 까닥했지만 둘은 물음표만 띄웠다. 동철이 손톱깎이를 던졌다. 책상 유리에 부딪치는 소리가 꽤 컸다. 태주가 흠칫 놀라며 동철을 쳐다보았다. 나영도 큰 눈으로 동철을 돌아보았다.
 “윤경장, 잠시 나 좀 봐.”
 “네, 계장님.”

 문을 닫으라고 손짓하자 나영이 따랐다. 태주에 대해서는 나영과 가장 얘기가 잘 통했다. 연탄가스 때도, 김복례의 집에서 코피를 흘릴 때도, 김현석 때도 나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동철은 목을 가다듬었다.

 한태주 안 그런 척하고 있지만 상태가 좋지 않아 보인다. 서울놈이 빌빌거리는 게 한두번이 아니지만 이번엔 뭔가 다르다. 동철의 말에 나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영이 봤을 때 서류를 보는 손은 떨렸고 선풍기 바람이 직방인데도 땀을 흘렸다.

 “어?”
 창문 너머로 태주의 동그란 머리가 움직였다. 나영도 뒤돌았다. 태주가 일어나 선풍기 머리를 용기에게 돌렸다. 땀을 저렇게 흘리면서 미친 놈이라고 중얼거리는 동철에게 나영이 말했다.
 “제가 무슨 일인지 여쭤볼게요. 오늘 약속 거절하신 것도 이상하다고 생각했거든요.”
 동철이 부탁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점심을 훌쩍 넘긴 시간, 나영이 수갑을 채운 범인을 창고로 데리고 들어왔다. 여름이라 문 열고 자는 집을 노린 강도였다. 전과도 있고 몽타주를 뿌려 잡는 건 어렵지 않았다. 동철과 태주가 나서지 않아도 나영의 선에서 해결할 만한 사건이었다. 태주는 창고에서 나왔다.

 보통 때 같으면 지하인 창고가 시원할 만한데 오늘은 달랐다. 화장실로 가서 세수를 하고 젖은 넥타이를 풀었다. 셔츠 단추를 두개나 풀었는데도 답답했다. 태주가 거울 속 자신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아픔이나 고통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다. 자만이라고 꾸짖는 걸까, 머리가 지끈거렸다. 고개를 떨구는데 세면대가 위로 솟구치는 것 같았다. 놀라서 수도꼭지를 잡고 섰다. 거울에 얼굴을 기댄 채 심호흡 했다. 그러나 몸의 열기는 더 심해졌고 한동안 잊고 있었던 이명이 덮쳤다. 다리에 힘이 풀리는 걸 간신히 버텼다. 세면대를 잡은 손이 떨렸다. 거울 속의 자신도 흔들렸다.

 “반장님, 괜찮으세요?”
 태주가 고개를 들었다. 화장실 문 앞에 선 나영의 모습이 흐릿했다.
 “미안합니다. 취조는 끝난 겁니까?”
 나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색이 안 좋아 보이세요. 무슨 일 있으신 거 아니죠? 오늘 약속도 거절하시고.”
 태주가 손등으로 땀을 닦았다.
 “그냥, 이맘 때 컨디션이 별로 안 좋아요.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걱정하는 나영에게 웃어 보인 태주는 발을 내딛었다.

 추를 매단 듯 무거운 발이 바닥에 닿지 않았다. 

 블랙홀에 빠지는 것처럼 발 밑이 아득했다. 

 아주 멀리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와, 듬직한 어깨가 볼에 닿는 걸 느끼며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아야야, 살살 좀 해!”
 “엄살은. 팔 좀 까진 게 대수냐!”
 동철과 박소장이 투닥거렸다. 동철은 팔 뿐만 아니라 무릎도 나간 거 같다고 투덜댔다.
 “아주 멀쩡해! 니 놈 대갈빡처럼 무릎도 아주 튼튼하다고.”
 박소장이 동철의 무릎을 때렸다. 찰진 소리에 웃음이 터졌다.
 “한태주, 웃냐?”
 “정신이 들었나 보네. 한동안 한반장 안 오나 싶더라니. 아주 보건소 단골 되겄어!”
 
 박소장은 태주의 눈꺼풀을 까뒤집었다. 턱을 쥐고 살피더니 혀를 찼다.
 “몸이 아프다는 신호를 보내면 좀 따라. 저놈이나 한반장이나 말을 지지리도 안 들어.”
 박소장은 몸살에 좋다는 주사 놔줄 테니 걸을 수 있으면 주사실로 오라고 했다. 동철의 무릎을 한 번 더 때린 뒤 진료실을 나갔다.

 “괜찮냐? 아니다, 안 괜찮은 거 아니까 대답하지 마. 으 쓰려라.”
 동철이 붕대를 붙인 팔꿈치를 호 불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동철이 벌컥 화를 냈다.
 “야, 화장실 바닥에 쓰러지려는 걸 내가 어 이르케 싹, 기가 막히게 잡아냈지. 덕분에 난 팔꿈치 까지고 무릎 나가고. 어휴.”
 태주가 상체를 일으켰다. 동철은 누워있으라고 하려다가 말 듣는 놈이 아니지, 하며 포기했다.
 “윤경장이 그러던데. 이맘때 원래 좀 몸상태가 안 좋다고.”
 “……”
 애초에 대답을 기대하지 않은 동철은 턱을 긁었다.

 “딸내미도 지 생일 가까우면 가끔 감기 심하게 걸리고 그러더라고. 마누라도 그때 되면 관절염이 도진다고 하고. 그러면 쉬던가, 아프다고 말을 하던가.”
 무식한 새끼라며 덧붙이는 동철이었다. 반응이 없어 또 정신을 잃었나 보는데 태주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자신을 쳐다보았다.

 “뭘 그렇게 봐?”
 “생일이요?”
 동철은 어이가 없었다.
 “그래, 니 생일!”
 “제가 말씀드린 적 없는데요.”
 동철이 뒷목을 잡았다. 그 바람에 붕대가 접혀 아프다고 다른 손으로 팔꿈치를 쥐었다.

 “인적사항에 다 나오는 구만 이 새끼가 진짜 누굴 똥멍청이로 알고.”
 그때 용기와 남식, 나영이 진료실로 들어왔다.


 “반장님, 괜찮으세요?”
 “윤경장, 미안해요.”
 나영이 고개를 저었다.
 “계장님이 도와주셔서 살았죠.”

 “반장님 이렇게 아프셔서 오늘 생일잔치는 하지도 못하겠네.”
 남식이 울먹거렸다. 용기가 눈을 부릅뜨고 남식의 뒤통수를 갈겼다.
 “잔치요?”
 용기를 때리는 동철과 시선을 피하는 나영을 보고 태주가 모든 걸 눈치챘다.

 “설마 이제까지 모여서 상의하시던 게 제 생일 준비였습니까?”
 동철이 씩씩댔다.
 “다 들켰다, 아주 잘 하는 짓이다!”
 어리둥절하던 태주는 풀 죽은 3반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울상이던 남식이 콧물을 훔쳤다.
 “반장님?”
 “제 생일이 뭐라고. 신경 안 쓰셔도 되는데요.”
 동철이 손을 내저었다.
 “됐어. 이미 들킨 거 우리 맘대로 할 거니까. 일단 가서 주사 맞고 와. 몸살은 주사 맞으면 직방이야.”
 동철이 태주의 등을 때렸다. 태주도 더 이상 3반에게 걱정 끼치기 싫어 주사실로 갔다.


 “형님, 다녀오셨습니까.”
 “어, 그래.”
 “반장님은 좀 어떠세요?”
 “죽 먹이고 잠드는 거 보고 나왔다. 퇴근할 때 다시 가볼 거야.”
 동철이 기지개를 켰다. 용기와 남식, 나영을 먼저 복귀 시키고 태주를 사택에 데려다 주고 왔다. 조퇴로 처리했다는 나영의 보고에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 근데 어떡해요?”
 준비한 생일 잔치는 어떡하냐는 남식의 말에 동철이 고민했다. 생일인 오늘, 아픈 사람 집에 쳐들어가는 것도 안 될 말이고 이대로 흐지부지 할 순 없었다. 동철의 눈치를 보는 1반과 2반의 모습이 용기의 파마머리 뒤로 보였다.
 “작전 변경이다.”
 이를 드러내며 웃는 동철에 3반이 침을 삼켰다.

 


 다음날, 태주는 햇살이 아닌 코고는 소리에 잠이 깼다. 

 가슴을 누르는 동철의 팔을 치우고 일어났다. 

 주사 덕인지 어제 아팠던 게 우스울 정도로 몸이 가뿐했다. 피곤한 건 남아있었지만 머리가 개운한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태주는 동철을 내려다보았다. 머리맡에 놓인 물바가지와 수건을 쥐고 자는 동철을 보고 웃음이 나왔다.
 
 “계장님, 일어나시죠.”
 “으어, 이제 좀 괜찮냐 태주야.”
 잠결이라 동철의 말투가 부드러웠다.
 “네, 저 먼저 씻을 테니 일어나세요.”
 태주는 동철의 배를 밟지 않고 다리를 뻗어 건너갔다.

 서부서에 들어선 동철이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했다. 그 모습을 보는 태주의 시선을 눈치챘다.
 “봤지, 너 아프면 여러 사람 고생한다니까. 앞으로 말 안하기만 해봐, 짜식이. 이제 진짜 괜찮은 거지?”
 “네. 주사 덕분인지 훨씬 괜찮아졌습니다.”
 “밤새 간호한 내 덕분이란 얘기는 안 하는 것 봐라. 싸가지가 바가지인 거 보니 다 나았네.”
 동철이 태주의 팔을 쳤다.
 
 “너 먼저 들어가라. 어젯밤에 한 개피도 못 펴서 죽겠다.”
 동철이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태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동철은 하품을 또 했다. 하울링처럼 길게 늘어진 하품이었다. 한쪽 눈만 뜬 채, 어딘가로 열심히 신호를 보냈다.

 “반장님 오셨어요.”
 태주가 나영의 인사를 받았다. 출근 시간이 코앞인데 강력계엔 나영과 태주 둘 뿐이었다.
 “다들 아직 안 왔습니까?”
 “1반하고 2반은 새벽에 신고 받고 바로 출동했어요. 이형사님하고 조형사님도 지원가셨고요.”
 “아.”
 
 “계장님은요?”
 “금방 오실 거예요. 어제는 미안했어요.”
 나영이 고개를 저었다.
 
 “아침은 드셨어요?”
 “예, 어제 계장님이 끓여 주신 죽……”
 태주의 말은 갑작스러운 굉음에 끊겼다.


 “이형사님! 사람 향해서 폭죽 쏘면 안 돼요!”
 “이미 쐈다 어쩔래.”
 남식과 용기의 말싸움은 동철이 시작한 노래에 묻혔다.
 
 “생일 축하합니다~”
 동철이 초를 꽂은 케이크를 들고 선창했다. 뒤이어 강력 1반과 2반이 고깔 모자를 쓰고 노래를 따라했다. 시끄러운 소리에 다른 부서 사람들도 모여들었다. 분위기를 끌어올리려는 동철의 손짓에 생일 축하 노래가 서부서 안에 울려 퍼졌다. 태주가 어리둥절해 하며 나영을 보았다. 나영은 뿌듯한 표정으로 박수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싸가지없는~ 한태주~”
 동철의 개사에 태주가 피식 웃었다.
 “생일 축하합니다!”
 남식이 휘파람을 불었다. 용기가 바람을 넣자 태주는 부끄러워하다가 초를 불었다.
 
 “우와아!”
 태주가 열심히 호응하는 형사들에게 허리숙여 인사했다. 태주의 미소에 강력계 형사들도 멋쩍어 했다. 
 “하루 지났지만, 뭐 우리 나름대로 노력했어.”
 동철의 말에 태주가 상관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들키긴 했지만 그들이 생일을 챙기기 위해 고군분투했다는 사실 자체가 웃기고 기뻤다.

 용기가 쭈뼛대더니 긴 상자를 내밀었다. 뭐냐고 묻자 용기는 풀어보라고 하더니 남식의 뒤에 숨었다. 

 군청색에 하얀 줄무늬가 있는 넥타이였다.
 “고맙습니다, 이형사님.”
 
 남식은 새 녹음기와 영양제를 내밀었다.
 “반장님 몸도 약하시고 많이 다치시기도 하고 그러셔서 제가 좋은 걸로 준비했습니다. 혹시 부적 맞추고 싶으시면 같이 가실래요?”
 끝까지 부적을 포기하지 않은 남식에 용기가 질려 했지만 태주는 웃으며 거절했다.
 “그거 좋은 거랜다, 임마. 꼭 챙겨 먹고. 내 선물은 이거.”

 동철이 쇼핑백을 내밀었다. 쇼핑백 안에는 상자 두개가 들었는데, 하나는 반팔과 반바지 세트, 또 다른 하나는 운동화였다.
 “감사합니다, 언제 이런 걸……”
 동철은 낯간지럽다며 태주의 감사인사를 거부했다. 

 나영은 리본으로 묶은 상자를 건넸다.
 “안경이에요. 반장님 눈이 많이 피로하신 거 같아서요. 도수는 나중에 저랑 맞추러 가요.”
 나영은 이따금씩 초점을 잃고 멍한 태주를 지켜봤다. 두통이 오면 눈과 귀를 비비는 습관과, 자발적인 야근을 하면서 서류를 보느라 눈을 혹사시키는 태주를 걱정했다. 섬세한 선물에 기뻤지만 비싼 가격을 걱정하자 나영이 손을 저었다.
 
 “이제까지 고마운 거 갚는 거라고 생각해 주세요.”
 “그래, 임마. 생일 아니면 용기가 너한테 선물을 하겠냐?”
 “아 형님, 왜 저를 끌어들이세요.”
 
 태주가 웃었다. 자신의 생일을 축하하겠다며 고민했을 3반이 상상되었다. 인상 험악한 용기가 넥타이를 고르는 모습, 영양제 어떤 게 좋냐며 약사에게 물어봤을 남식, 태주에게 어울릴까 아닐까 안경을 들어보는 나영과 한여름에도 덥게 입고 다니는 자신을 구박하면서 옷을 골랐을 동철까지. 그리고 동철의 압박이 있었겠지만 고깔까지 쓰고 노래를 불러 준 형사들도. 태주는 양손 가득한 선물과 3반과 형사들을 바라보았다.

 “이거 봐라, 울겠는데.”
 “제가 앤가요. 일 들 하시죠.”
 동철이 크하고 감탄했다.
 “역시 싸가지없는 서울놈.”
 동철을 비롯한 모든 이들이 태주가 그럴듯한 감사인사를 할 거라고 기대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오히려 하면 낯간지러워 어쩌나 걱정했다. 동철이 케이크를 상자에 집어 넣자 형사들도 고깔을 벗었다.

 


 점심시간이 되어, 3반은 회식 아닌 회식을 열었다. 냉장고에 넣어뒀던 케이크와 나영이 부친 전과, 용기가 끓인 미역국과 밥, 남식이 사온 과일들과 동철이 급하게 나가서 사온 인성 통닭까지. 용기가 직접 한 음식이 아니지 않냐며 구박하는 소리는 동철의 호탕한 웃음 소리에 무시당했다. 남식이 토끼모양으로 사과를 깎아 태주 앞에 놓았다. 나영이 태주의 공기에 올린 전 위로 동철이 통닭 살을 발랐다. 나영의 웃음소리와 엎치락뒤치락하는 동철과 용기, 그 둘을 피하며 과일을 깎는 남식. 예전 같으면 소음에 불과했을 소리들 덕에 웃고 있다. 

 

이곳에서 살아가기로 한 이후의 첫 생일을, 


이곳에서 살아가기로 한 이유들과 함께 보내는 이 시간이,


일분일초가,


미치도록 소중했다.

 

 

 

                                                                                                                                                                                                                                                                       -‘연례행사’ 끝-
 

 

로넴(@novel_gintoki) 

​HAPPY BIRTHDAY
HAN TAE J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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