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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보라

​생일은 가족과 함께

 

찜통 같은 무더위가 가시고, 적당히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던 늦여름이었다. 무심코 달력을 바라본 한태주가 아, 하는 소리를 냈다. 8월 24일, 제 생일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8월보다는 9월에, 여름보다는 가을에 가까이 위치한 생일은 날이 더울 때는 늘 잊혀 있다가 시원한 바람과 함께 기억되곤 했다. 한태주는 올해도 그냥 지나칠뻔한 생일을 가만히 곱씹었다. 그래도 생일인데, 한태주는 잠깐 휴가를 갈까 고민했다. 1988년으로 떨어진 이후, 제대로 쉰 적이 하루도 없었다. 마침 서부파도 정리가 되어가는 중이었다. 2018년에서는 뭘 했더라, 여행을 갔던가. 머릿속으로 벌써 휴가 계획을 착착 세우던 한태주가 빙글빙글 돌리던 펜을 뚝 멈췄다. 어머니. 한태주는 어머니를 뵈러 가기로 했다.

 

 비록 인성시에서의 기억은 모두 지웠지만 한태주는 어릴 적 일을 드문드문 기억하고 있었다. 대충 여기서 멀지 않은 마을로 간 어머니께서 다시 시작하신 미용실이나, 그런 어머니 곁을 지킨 고모의 화장품이나, 아버지가 사우디로 가지 않았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은 날 밤이나 하는 것들. 한태주는 퇴근 후에 과일 바구니를 하나 사서 어머니의 미용실을 찾아갔다. 한말숙이 이사 가기 전 쥐여줬던 쪽지는 제 기능을 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적당한 변명거리는 되어 주었다. 인성의 미용실보다 조금 낡은 감이 있는 건물 앞에 한태주가 섰다. 문을 열자 코를 강하게 찌르는 파마약 냄새가 한태주를 가장 먼저 반겼다.

 "어서 오세요- 어머, 형사님!"
 "안녕하세요."
 "여긴 어떻게 아시고...."
 "한말숙 씨가, 주소를 주고 가셔서요."

 한태주가 꾸깃꾸깃 접힌 쪽지를 내밀었다. 김미연이 한말숙의 글씨를 알아보고 살풋 웃었다.

 "아 아가씨가.... 그런데 어쩌죠, 아가씨 지금 집에 안 계신 데."
 "아뇨, 그래서 온 게 아니고."

 한태주가 숨을 잠깐 참았다. 김미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한태주를 살폈다. 턱 막힌 숨을 뱉아내고, 한태주가 머리끝을 탁탁 털었다.

 "저 머리 좀 자르려고요."

 나름 당당하게 말했지만 어색하게 굳은 표정을 보고 김미연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귀까지 빨개진 한태주에게 자리를 안내했다.

 "여기 앉으세요 형사님."

 여기 앉으세요 왕자님-

 웃음기 띈 목소리는 어릴 적 어머니의 목소리와 같았다. 울컥울컥 차오르는 감정을 꾹 누른 한태주가 고개를 까딱 숙이고 의자에 앉았다. 김미연이 가위를 꺼내 들고 한태주의 머리를 다듬기 시작했다. 사각사각, 기분 좋은 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한태주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왜 머리하러 여기까지 오셨어요? 물으려던 김미연이 한태주와 닮은 입을 꾹 다물었다. 한태주의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던 무의식적인 배려였다. 한태주가 저 질문에 대한 답은 해주지 않을 것 같기도 했고.

 "다 됐습니다."

 다 됐습니다!
 엄마 최고!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해서, 한태주가 저도 모르게 미소지었다. 눈을 뜨자 머리가 조금 단정해진 자신이 낯선 표정을 짓고 있었다. 조금 당황한 한태주의 안색을 살피며 김미연이 물었다.

 "마음에 안 드세요?"
 "아뇨, 아니요. 마음에 들어요."

 정말요. 작게 덧붙인 한태주의 말에 김미연이 미소지었다. 한태주가 따라 웃었다. 두 사람의 미소가 꼭 닮아 있었다. 거울 속에서 마주친 얼굴이 낯이 익어 한태주가 시선을 피했다. 김미연은 조용히 미용 도구들을 정리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한태주가 지갑을 꺼내자 김미연이 깜짝 놀라 말렸다.

 "형사님 넣어두세요. 제가 어떻게 돈을 받아요."
 "아닙니다. 그...."
 "저랑 아가씨랑 우리 태주를 얼마나 도와주셨는데요. 형사님 머리는 제가 평생 돈 못 받죠. 정말 괜찮아요."
 "그럼, 저 이거라도."

 한태주가 타이밍을 놓쳐 건네지 못했던 과일바구니를 드디어 김미연의 손에 얼른 쥐여줬다. 김미연은 받을 수 없다는 듯 곤란한 표정을 지었지만 한태주가 한발 빨랐다.

 

 "태주 선물이에요. 태주가 좋아하잖아요. 태주가 밥은 안 먹어도, 과일은 잘 먹으니까."
 "그걸 어떻게...."
 "그, 저번에 밥 먹을 때 들었어요."
 "제가 별소릴 다 했었네요. ...늘 감사합니다 형사님."

 한태주는 어머니의 말에 답을 찾기가 힘들었다. 전혀 감사할 필요가 없는데. 섣불리 말을 꺼내지 못하는 한태주를 구원한 건 딸랑거리는 방울 소리였다. 미용실의 문이 열리고 노을이 확 쏟아졌다.

 "엄마!"
 "태주야, 왔어?"
 "어 경찰 아저씨도 있네요?"
 "으응 아저씨가 태주 선물 주셨어. 인사하고 고맙습니다~ 해야지?"
 "아저씨 안녕하세요! 고맙습니다!"
 "그래. 많이 먹어. 어머니 힘드니까 밥도 잘 먹고."
 "네! 그런데 저 이거 생일 선물이에요?"

 생일 이야기를 꺼낼 시기를 잡지 못하고 있던 한태주가 옳지, 하고 말을 받았다. 한태주가 태주를 번쩍 안아 들고 생일이냐 물으니 아이 입에서 대답이 술술 나왔다. 제 생일을 자랑하고 싶어 안달 난 꼴이, 딱 여섯 살 난 어린아이였다.

 "네! 저 열 밤만 자면 생일이에요!"
 "정말? 우와, 아저씨가 몰랐네. 뭐 갖고 싶은 거 없어?"
 "어머 괜찮아요. 형사님."

 김미연이 한태주를 말렸지만, 이번만큼은 한태주의 양보가 없었다. 왜냐하면, 드문드문 남아있는 어렸을 적 기억에는 아버지가 더는 보이지 않았던 해의 생일날도 있었으니까. 한태주는 그게 평생 마음 한구석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자기연민은 아니고, 그 날 밤 처음 본 어머니와 고모의 눈물이 꽤 아팠었다. 

 '아빠 일하러 가서 놀지도 못하고. 나 놀이동산 가고 싶었는데.'
 '고모랑 엄마는 일하러 가야 하잖아. 미안해 태주야. 엄마가 미안해.'
 '아니야 엄마.... 나 괜찮아. 미안해.'

 칭얼거리는 저를 달래는 어머니의 눈이 너무 슬퍼서. 한태주는 그 뒤로 뭘 하고 싶다고 할 수가 없었다. 주변에서는 애가 철이 일찍 들었다고들 했지만, 그런 건 아니었다. 한태주는 겁이 많아서 어머니의 우는 얼굴 보는 것이 무서울 뿐이었다. 그리고 한태주는 정도 많아서, 이 어린 애는 그런 경험이 없었으면 했다.

 "생일에 뭐 하고 싶은 거 없어?"
 "어, 저는요 엄마랑 아빠랑 놀이동산 가고 싶어요."
 "태주야!"
 "그런데 아빠가 일하러 가셨잖아요. 우리 아빠 슈퍼맨이라서 사람들이 막 찾는대요! 그래서 못 갈 수도 있어요...."
 "그럼 아저씨랑 놀이동산 갈래? 아빠가, 태주 잘 놀아달라고 아저씨한테 부탁했거든."
 "형사님,"
 "와 정말요? 정말요? 와 아저씨 최고!"
 "그래. 밖에서 놀다 왔지? 손발 잘 씻고 오면 아저씨랑 놀이동산 갈 수 있어. 자!"

 태주는 발이 땅에 닿자마자 총알 같이 집 안으로 뛰어갔다. 미용실에서 집으로 통하는 문이 닫히고, 김미연이 한태주를 바라봤다. 그 시선 속에는 미안함, 고마움, 고단함 같은 것들이 복잡하게 담겨 있어서. 한태주는 그런 어머니의 시선은 본 적이 없었다. 사고를 쳐놓고 빳빳하게 굳어 있는 한태주에게 김미연이 표정을 풀고 말했다. 이 형사님께는 거짓으로도 싫은 소리를 못 하겠다고.

 "형사님 말씀은 정말 감사하지만.... 태주한테 너무 큰 희망은 안 주셨으면 좋겠어요."
 "정말로 데리고 갈 거예요. 제가 데리고 갈게요."
 "아뇨. 간다고 하면 제가 가게를 하루 쉬고 가면 되는데...."
 "어머님 혼자서 아이 데리고 가기 힘들잖아요. 그럼 제가 모시고 갈게요. ...제가 불편하세요?"
 "형사님께는 늘 감사하죠. 그렇지만 형사님 바쁘실 텐데 너무 시간 뺏는 건 아닌가 싶어서요."
 "저 그 날 휴일이라서 괜찮아요."
 "휴일에는 쉬셔야죠. 놀이동산은 아가씨 쉬는 날에 제가 데리고 갈게요."
 "저도, 저도 놀이동산, 가고 싶어서요."

 태주는, 사실 엄마랑 놀이동산에 가고 싶었다.

 

 

 웬일로 한태주가 일찍 퇴근한 그 날, 강력 3반은 급하게 계장실로 모였다. 볼 사람 하나 없는데도 조남식은 끝까지 뒤를 꼼꼼하게 확인하고 문을 닫았다. 어두운 계장실 안에서 강동철은 블라인드까지 치고 꿀꺽, 침을 삼키는 3반에게 입을 열었다.

 "그래서, 한태주 생일이 6일 뒤라고?"

 비밀스러운 회의가 시작됐다.

 

 

 다음 날 아침 한태주는 거짓말처럼 8월 31일에 휴가 신청을 했다. 그걸 본 강동철이 실없이 웃으며 한태주에게 추근덕거렸다.

 "8월 31일~? 이날 쉰다고? 응?"
 "뭡니까? 일이 있어서 쉽니다. 뭐 바쁜 사건이라도 터졌어요?"
 "에이, 그래! 모른 척 해!"

 한태주가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쳐다봤지만, 강동철은 호탕하게 웃으며 한태주 등을 퍽퍽 치고 떠났다. 연기 잘하네 한태주! 그 상황을 지켜 보고 있던 강력 3반의 얼굴에도 숨길 수 없는 미소가 슬쩍 떠올랐다.

 역시 우리 축하를 기다리고 계시는구먼!
 원래 다들 생일날에는 좀 들뜨고 축하받기를 기대하는 법이니까요.
 반장님 지금 저희 파티 몰래 기대하시는 거 맞죠? 아 반장님 은근히 좀 귀여우시다니까요.

 말없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시선에, 한태주만 머릿속에 물음표를 가득 그렸다.

 "할 말 있습니까?"
 "아닙니다, 반장님!"

 참다못해 던진 물음에 이용기가 재깍 대답했다. 하지만 그 대답이 퍽 장난스러워 한태주는 찝찝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 뒤에 따라붙는 3반의 이상한-흐뭇한-미소 때문에 더 그랬다. 하지만 한태주가 88년도에 완전히 녹아든 이후 그들은 종종 한태주에게 이상한 장난을 치곤 했었다. 한태주는 지금 이 상황도 그런 장난이겠거니, 생각하고 넘기기로 했다. 반응을 말아야지. 고개를 젓고 서류로 시선을 옮기는 한태주를 보며, 3반은 반장님이 부끄러 한다고 생각해 키득키득 웃었다. 미묘한 동상이몽이었다.

 

 

 일주일은 순식간에 흘렀다. 전날 소나기가 잠깐 내려 걱정했지만, 8월 31일 인성시의 날씨는 아주 좋았다. 편한 옷을 입고 사택을 나선 한태주의 표정이 딱 한태주를 아는 사람이나 눈치챌 수 있을 만큼만 밝았다. 평소보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도착한 미용실 문 앞에는 태주가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멀리서부터 들리는 한태주의 발소리에 고개를 바짝 든 태주가 큰 소리로 엄마를 찾았다.

 "엄마! 아저씨 왔어!"
 "오셨어, 라고 해야지 태주야. 형사님 오셨어요?"
 "안녕하세요. 안녕?"
 "안녕하세요! 아저씨 빨리 놀이동산 가요. 놀이동산!"

 히히, 웃은 태주가 한태주의 옷자락을 잡고 흔들었다. 조금 망설이던 한태주가 태주의 손을 살짝 잡았다. 마주 잡아 오는 작은 손에는 힘이 바짝 들어가 있어서, 한태주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제 기억 속의 어린 태주는, 기차역 사건 이후 한참을 앓고 난 뒤 말수도 줄고 오랫동안 힘들어했었다. 하지만 이곳의 태주는, 따끈한 손이 꼬물꼬물 움직여 성마른 손을 야무지게 고쳐 잡았다.

 "가요!"

 밝게 웃는 아이 얼굴을 보며, 한태주도 마침내 활짝 웃었다. 그래, 가자!

 

 

 놀이동산에 도착한 태주는 정말로, 정말로 신나게 뛰어다녔다. 이거요! 저거요! 낭랑한 목소리가 불쑥 울리면, 옷이 잡혀 질질 끌려가는 남자가 그 뒤를 따랐다. 근처 벤치에는 그 둘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 여자 한 명이 있었다. 평일이라 사람이 얼마 없는 놀이동산에서 태주는 타고 싶던 놀이기구를 원 없이 탈 수 있었다. 물론 어린아이가 탈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태주와 한태주는 탔던 놀이기구를 몇 번이고 탔다. 처음에는 같이 회전목마를 타주던 김미연은 딱 3번, 정확하게 24바퀴 같은 자리를 빙빙 돌고 한태주에게 부축 당해 비틀거리며 벤치로 갔다. 

 "어머님 괜찮으세요?"
 "네, 전 괜찮아요. 저보단 형사님이 더 걱정이죠. 애가 간만에 나와서 그런지 신이 났나 봐요."
 "저도 정말 괜찮습니다. 생일이잖아요. 많이 피곤하세요?"
 "아뇨, 죄송해서 그렇죠."
 "저는.... 저는 좋아요. 정말로요."
 "엄마! 엄마 괜찮아? 엄마 아파?"

 태주는 엄마 걱정에 놀던 것도 멈추고 팔에 딱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으려고 했지만, 한태주와 김미연이 겨우 달래 다시 활기를 찾았다.

 "아저씨! 아저씨 저 이거요!! 비룡열차 타고 싶어요!!"

 "죄송해요. 비룡열차는 신장 110cm 이상이 되셔야 이용이 가능합니다."
 "아, 그래요? 태주야, 그, 우리 이건 다음에 탈까?"
 "저 이거 타고 싶은데...."
 "내년 생일에도 아저씨랑 오자. 그때는 키 더 커서 다른 것도 많이 타자."

 응? 자세를 낮추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래는 한태주에 눈물이 아롱아롱 달린 고개가 끄덕였다. 옷자락 대신 손을 꼭 쥐어오는 아이에, 한태주가 빙긋 웃었다.

 "아저씨 내년에도 같이 와줄 거죠?"
 "당연하지."
 "히히 그럼 저 회전목마 탈래요! 이번에는 엄마 대신 아저씨가 마차 타세요. 제가 지켜드릴게요!"

 또...? 입 밖으로 나올 뻔한 말을 꾹 참아내고 한태주가 작은 손에 맥없이 끌려갔다. 정확하게 8번째 타는 회전목마였다. 어렸을 적 감상에 젖을 시간도 없이, 한태주는 신장 105cm의 태주가 탈 수 있는 3개의 놀이기구를 몇 번이고 탔다. 아이와 노는 건, 어쨌든 체력 싸움이었다. 바닥까지 떨어졌던 체력을 한태주가 다시 끌어올렸다. 그래, 생일인데. 한태주는 오늘 하루 원 없이 놀기로 했다.

 


 가을과 가까운 날이라고 해도 해는 제법 길었다. 놀이동산 폐장 시간까지 신나게 논 태주는 오는 길에 잠들어 한태주의 등에 업혀 가야 했다. 김미연과 한태주는 버스정류장에서 집까지 꽤 되는 거리를 말없이 걸었다. 어색한 것은 아니었다. 두 사람 모두 말을 한참 고르는 버릇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노을이 조금씩 지고, 세 사람, 아니 두 사람의 그림자가 점점 길어졌다. 먼저 입을 연 것은 한태주였다.

 "저는.... 어렸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생일날 놀이동산에 못 갔었거든요. 그게, 나중에 되면 참 별 게 아닌데, 그게 그렇게 속상해서. 그 뒤로 놀이동산에 가본 적이 없었어요. 가기 싫더라고요."
 "아...."
 "어머니도 평생 미안해하셨는데, 그 모습을 봐도. 도저히 놀이동산은 못 가겠어서. 오늘 그 날 이후로 처음, 놀이동산에 갔었네요. 데리고 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형사님. 저희가 감사하죠."
 "아뇨, 정말로 제가 감사해요."

 한참을 말이 없던 한태주가 속삭이듯 내뱉았다. 이 태주는 안 그랬으면 좋겠어요. 김미연이 조금 울 것 같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태주는 안 그럴 거예요. 작은 목소리를 똑똑히 들은 한태주가 편하게 웃었다. 맞아요, 제가 그렇게 도울 거예요. 뒷말은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따뜻한 노을이 여전히 세 사람의 머리끝에 머물러 있었다.

 

 대화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 사람은 미용실 앞에 도착했다.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는 태주를 집 안까지 눕혀준 한태주에게 김미연이 거듭 고마움을 전했다. 한태주는 민망함에 손사래 치며 미용실을 나서려는데, 김미연의 질문이 한태주의 발목을 잡았다.

 "아 참, 그런데 형사님 생일은 언제예요?"
"아, 그게...."

 거짓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우선 금방 탄로 날 거짓말이었다. 한태주는 솔직하게 제 생일을 말했다.

 "오늘입니다."
 "아니, 생일이신데.... 여기서 왜,"

 김미연이 깜짝 놀라 미간을 찌푸리자 한태주가 어쩔 줄 몰라 횡설수설 말을 이었다.

 "아뇨, 저는, 어, 가족도 없고. 괜찮습니다. 정말로."
 "그래도 그렇죠. 안 되겠어요."

 김미연은 이대로는 안 된다고 나가려던 한태주를 질질 끌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단호한 표정에 한태주는 기가 죽어 얌전히 끌려갔다. 방 안에 앉혀진 한태주는 가만히 앉아 데록데록 눈만 굴렸다. 뭘 하시려는 거지? 의문이 들자마자 이내 코끝에 따뜻한 밥 냄새가 닿았다. 벌떡 일어나 주방으로 가자 열심히 상을 차리는 김미연의 모습이 보였다.

 "들어가 계세요. 생일에 제가 딱히 해드릴 건 없어도 저녁은 맛있게 드셔야죠."
 "....... 감사합니다."

 쉽게 괜찮다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거절할 수도 없었다. 한태주는, 태주는, 그 따뜻한 저녁이 그렇게도 고팠으니까. 하루 종일, 오늘 일어나고 난 다음부터 내내, 어쩌면 매일. 입술을 깨물고 한참 망설이다 겨우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를 뱉은 한태주를 김미연이 가만히 쳐다봤다. 금방 차려요. 손 씻고 방에 가서 있으세요. 한태주가 울컥 차오르는 감정을 누르고 겨우 대답했다. 네.

 김미연이 상을 차리는 동안 한말숙이 퇴근하고 부리나케 집으로 들어왔다.

 "태주야! 고모 왔다! 우리 태주 생일 선물도 사왔... 지.... 안녕하세요 형사님?"
 "안녕하세요."
 "아가씨 왔어요? 태주는 놀다 와서 자고 있어요."
 "아, 그래요? 근데 형사님은...."
 "오늘 태주랑 많이 놀아주셨는데, 생일이라고 하셔서. 저녁 대접해 드리려고요. 괜찮아요?"
 "완전 괜찮죠! 형사님 말씀 들었어요. 우리 태주 데리고 놀이동산 가주셨다고."

 와르르 쏟아지는 한말숙의 수다에 김미연이 조금 웃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늘 정신 없는 한말숙의 입담에 한태주가 혼을 쏙 뺏기는 동안 저녁이 다 차려졌다. 김미연이 상을 들고 방으로 들어오자 한태주가 벌떡 일어나 상을 들었다. 김미연이 그것 마저 막아버릴까 허둥거리는 모습에, 김미연과 한말숙이 웃음을 터뜨렸다.

 

 차려진 밥상은, 말 그대로 상다리가 부러질 것같이 호화로운 밥상이었다. 밥그릇 가득 담긴 고봉밥, 잡채, 나물 반찬, 소고기미역국에 갈비찜까지. 푸짐한 상에 한말숙이 입을 딱 벌렸다.

 "아이구 힘 좀 쓰셨네!"
 "태주 생일이니까. 어서 들어요."
 "...."

 하지만 한태주는 한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게 또, 다 태주가 좋아하던 반찬들이어서. 참지 못하고 눈가에 눈물이 고이자 그 모습을 본 한말숙이 목소리 톤을 조금 더 높여 떠들었다.

 "어서 드세요, 형사님. 우리 언니 음식 솜씨가 또 엄청 대단하잖아요."

 그리고 약속한 듯 두 사람 모두 한태주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한말숙은 수저통을 찾겠다며 일어났고, 김미연은 물을 떠 오겠다고 일어났다. 한태주가 찔끔 나온 눈물을 얼른 찍어 눌렀다. 옷에 동그랗게 자국이 남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투둑, 하고 눈물이 더 떨어졌다. 숟가락에 밥을 한가득 퍼 입에 욱여넣었다. 태주는 그렇게 울음을 밥이랑 넘기며 한참을 울었다. 닫힌 문밖에는 어머니와 고모가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꺽꺽거리는 소리가 줄어들자 김미연과 한말숙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빨개진 눈가를 미처 정리하지 못한 한태주를 못 본 척, 각자 자리에 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김미연이 가져온 컵에는 물이 반보다 조금 덜 남아 있었다. 그게 고마워서, 한태주가 남은 밥을 열심히 비웠다. 그리고 자신도 놀랄 만큼 빠르고 맛있게 밥 한 공기를 다 해치웠다. 식기 달그락거리는 소리 가득하던 방에서 소리 하나가 줄었다. 아닌 척 한태주를 내내 신경 쓰고 있던 두 사람이 그걸 놓칠 리가 없었다. 입을 연 건 한말숙이었다.

 "형사님, 다 드셨어요?"
 "네."
 "맛있죠?"
 "네, 정말 맛있었어요."

 향수 가득한 목소리에 김미연이 가만히 물었다. 한 그릇 더 드릴까요? 한태주가 눈치를 보다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한말숙이 살갑게 웃으며 한태주의 밥그릇을 냉큼 가져갔다. 형사님 입맛에 맞나 보네요! 하긴 저번에도 잘 드시더라. 잘 먹고 다니세요, 자꾸 살이 빠져서 안쓰러워 죽겠어. 주방까지 가면서도 끊어지지 않는 수다에 한태주가 살짝 웃었다. 어머니의 흔적 가득한 웃음을, 김미연은 어디서 본 적이 있었나, 고개를 갸웃했다.

 

 결국, 밥을 두 공기나 비운 한태주가 머쓱하게 웃었다. 잘 먹었습니다. 웅얼거리는 말을 또 어떻게 들었는지, 한태주 먹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김미연과 한말숙이 생글생글 웃으며 눈을 맞췄다. 그리고 이번에는 한태주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두 사람은 열심히 설거지하는 한태주를 바라봐야 했다. 마른 등이 왠지 씩씩해 보였다. 다 큰 성인 남자에게 붙일만한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장성한 아들을 보는 기분이 들었다. 우리 태주랑 이름이 같아서 그런가, 김미연은 마음 쓰이는 형사를 한참이나 쳐다봤다.

 설거지를 끝내고 집에 돌아가려는 한태주를 김미연이 잡았다. 그리고 아까 몰래 담아뒀던 반찬들을 손에 바리바리 들려주었다. 뻣뻣하게 굳은 한태주는, 또 거절하지 못했다.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었다. 민폐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 어머니는 자신을 모른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놓을 수 없었다. 애꿎은 입술만 꾹 물던 한태주 손을 김미연이 꼭 붙잡았다.

 "그냥 받아요."
 "....고맙습니다."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건넨 말은 저게 다였다. 김미연은 말없이 배웅했다. 한태주의 양손이 무거웠다. 하지만 발걸음은 전에 없이 가벼웠다. 

 

 

 한 편, 한태주의 집에서는 망한 생일 파티의 케이크를 넋 나간 얼굴로 바라보고 있는 3반이 있었다.

 "한태주.... 어디 갔지...."
 "반장님 생일이라고 가족 보러 간 거 아닙니까? 서울이나 그런 데로요."
 "그건 아니야...."
 "제가 오늘 아침에 반장님 편하게 입고 어디 가시는 거 봤는데,"
 "그걸 왜 이제 말해 이 새끼야!"

 "악! 아니, 저는 그냥 어디 나가실 줄 알았죠! 반장님 어디 가셨지...."

 잔뜩 울상을 지은 조남식의 혼잣말을 끝으로, 네 사람 사이의 대화는 다시 단절됐다. 퇴근 후 좁은 사택에 한태주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꾸역꾸역 들어온 것까지는 좋았다. 집에서 각자 싸 온 반찬으로 생일상을 차리고, 케이크까지 완벽하게 준비해 불도 켜지 않고 숨어 있던 것까지는 완벽하다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한태주가 없었다. 차마 반찬에는 손도 대지 못하고, 네 사람은 주린 배를 잡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천천히 떨어지는 해가 네 사람의 얼굴을 비추다 사라졌다. 계속 입을 다물고 있던 윤나영이 해가 완전히 떨어지고 딱 한 마디 했다.

 "반찬 다 식었겠다."

 잔뜩 흥분해 서울에서 온 까칠한 반장님의 생일을 축하하려던 분위기도, 한순간에 식어버렸다. 윤나영의 말을 끝으로 10분에 한 번꼴로 '반장님 오시겠죠?' 하던 조남식의 물음도 뚝 멎었다. 늦여름의 밤은 짧은 만큼 어두웠다. 혹시나 한태주가 돌아오면 어쩌나 하는 기대감 때문에, 네 사람은 불도 켜지 못하고 한 치 앞 정도만 겨우 보이는 집을 가만히 지켰다. 강동철은 끊은 담배를 생각했고, 이용기는 품속에 있는 술병을 만지작거렸다. 윤나영은 저녁 시간을 훌쩍 넘긴 시계를 힐끔거렸고, 조남식은 손에 쥐고 있던 라이터를 의미 없이 찰칵거렸다. 그러기를 몇 분, 인기척이라곤 느껴지지 않던 바깥에서 문이 확 열렸다.

 "우와아악!!"
 "....뭣들 합니까?"

 그토록 기다렸던 한태주의 등장이었다.

 

 한태주는 집 근처에 오자마자 풍기는 냄새에 걸음을 우뚝 멈췄다. 집의 불은 꺼져 있었지만, 제집 근처에는 가정집이 없었다. 이 시간에 맛있는 저녁 냄새를 풍기는 집은 더욱. 가까이 갈수록 더 진해지는 냄새에 한태주가 우뚝 멈췄다. 집에 누군가 있다. 그리고 그건 높은 확률로 강력 3반, 제 식구들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불도 꺼놓고 뭐 하자는 건지. 아니면 와서 밥이라도 먹고 갔나? 나 휴가 냈다고? 이 사람들이.... 얼추 맞기는 했지만, 방향이 어긋난 추측을 끝낸 한태주가 망설임 없이 문을 확 열었다. 하지만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집 안에는 잔뜩 불쌍하게 몸을 구기고 앉아 있던 네 사람이 있었다. 깜짝 놀란 사람들의 비명에 같이 놀란 한태주가 인상을 찌푸리고 물었다.

 "뭣들 합니까?"

 이게, 뭐....
 들릴 듯 말 듯 작게 중얼거린 한태주가 여전히 얼빠진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사람들과 하나하나 눈을 맞췄다. 3반 사람들은 한태주를 놀래주려다 졸지에 놀라버려서 그런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문 앞에 있어서 가장 놀란 강동철이 심장 부근을 부여잡고 있다가 커다란 입을 열어 호통을 치려고 할 때, 정신을 차린 윤나영이 재빨리 선수 쳤다. 좋은 날 큰 소리가 오가는 꼴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폭죽 터지는 소리가 네 사람의 시선을 끌었다.

 "반장님! 생일 축하드려요!"

 왜 이제 왔느냐고 싸울 준비를 하고 있던 강동철과 이용기도 어영부영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그래, 한태주 생일 축하한다."
 "축하드립니다, 반장님."
 "반장님! 생일 축하드립니다!"

 가장 늦게 정신을 차린 조남식이 뒤에 숨겨뒀던 고깔을 냉큼 한태주의 머리에 씌웠다. 이번에는 그들의 계획대로 깜짝 놀란 한태주가 몸을 뻣뻣하게 굳혔다. 당황한 얼굴을 재밌다며 감상하던 것도 잠시, 조남식은 이용기의 등쌀에 케이크 촛불을 후다닥 밝혔다. 어두운 집을 따뜻한 색의 촛불이 가득 채웠다.

 "한태주! 소원 빌어! 소원!!"
 "어, 아, 없습니다."
 "아 그래도 빌어!"
 "어 그럼, 다 건강하고 제가 여기서...."
 "야 그걸 말하면 어떡해!"
 "맞아요 반장님! 원래 소원은 속으로 빌어야 된다고 그랬어요!"

 당장 펼쳐진 광경만 해도 어이가 없는데, 눈앞에 들이 밀어진 촛불과 등이며 어깨를 툭툭 치는 강동철의 손은 더욱 한태주를 황당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얼추 생일 파티 흉내를 낸 모습을 보고 금방 상황 파악을 끝낸 한태주가 피식 웃었다. 조금 많이 어설프기는 해도, 생일 파티인데 구색은 맞춰 줘야지. 한태주가 시키는 대로 얌전히 눈을 내리깔았다.

 제가 1988년도에 계속, 이대로만 머물 수 있게 해주세요.

 

 

 한태주는 한참이나 눈을 뜨지 못했다. 소원을 빌고 찾아온 먹먹한 감정 때문이 아니라, 촛불을 끄자마자 45살 먹은 강동철이 케이크를 한태주 얼굴에 처박았기 때문이었다. 한태주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입에서는 생크림 맛이 났다. 끌어 오르는 화를 누르고, 한태주가 집 씻듯 말했다.

 "뭐 하시는 겁니까?"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웃음뿐이었다. 눈을 뜨지 않아도 눈에 보이는 듯한 웃음이었다. 호탕한 웃음, 조금 약 올리는 것 같은 웃음, 작게 키득거리는 웃음, 웃지 않으려고 애쓰는 웃음까지. 즐거운 소리에 결국 한태주도 표정을 풀고 입꼬리를 당겼다. 그렇게 거칠게 놀리고는 또 조심해서 한태주 얼굴에 묻은 생크림을 손으로 훔친 강동철이 하하 웃으며 가볍게 물었다.

 "웃으니까 보기 좋네! 너도 생일 축하 받으니까 고맙지?"
 "....네."

 한참을 뜸 들이다가, 한태주가 조그맣게 대답했다. 고맙습니다.

 "에이, 뭐 이런 거 가지고."

 조금 울컥하는 분위기를 풀어보려 강동철이 너스레를 떨었다. 하지만 한태주는 바닥만 쳐다보다 한 번 더 인사했다. 정말로, 고맙습니다. 울지 않으려는 듯 한태주가 입술을 꽉 물었다. 입술에서는 여전히 생크림의 단맛이 났다. 분위기는 풀릴 줄을 몰랐다. 강동철도 이용기도 입을 다물고 딴청을 피웠다. 제 옆에서 먼저 울려고 하는 조남식을 발견한 윤나영이 손뼉을 쳐 겨우 분위기를 풀었다.

 "그럼 밥 먹을까요? 다들 저녁도 못 먹었는데!"
 "어어, 그래그래! 밥 먹자!"
 "반장님 얼른 들어오세요. 근데, 손에 들린 건 뭡니까?"
 "어.... 저 밥 먹고 왔는데...."

 겨우 풀린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네 사람이 한태주를 빤히 쳐다봤다. 느껴지는 압박감에 기가 죽은 한태주가 시선을 피했다.

 "두 그릇...."
 "어디서."
 "태주네 집에서요."
 "거기는 왜...?"
 "오늘 태주가, 생일이라고 해서."
 "...."
 "죄송합니다."

 

 공기에 숨이 턱턱 막힌다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한태주가 생각했다. 남들 앞에서는 생전 본 적 없는 눈치를 보던 한태주가 데굴데굴 굴리던 눈을 깔고 다시 사과했다.

 "미안합니다."
 "아니, 니가 죄송할 게 있나 뭐...."

 식탁에 차려진 반찬들만 들쑤시던 강동철이 애써 대답했다. 생일 파티도 망하고, 저녁 식사도 망했다. 3반의 머릿속에는 이 생각만 둥둥 떠다녔다. 이용기의 말에 혹해 서프라이즈라고 한태주를 놀래줄 생각부터 앞섰던 것이 문제였다. 일주일의 고민과 노력이 모두 허사로 돌아가고 있었다. 차게 식어가는 반찬들을 바라보며, 네 사람이 차례로 입을 열었다. 우울한 목소리가 한태주 마음에 콕콕하고 박혔다.

 "이거 내가 마누라한테 일주일 전부터 배워서 해온 갈비찜인데...."
 "이거 아침에 정육점에서 막 잡은 소고기로 끓인 소고기미역국인데...."
 "제가 잡채 만들어 왔는데, 맛없겠죠."
 "저희 집 김치가요, 진짜 맛있어요...."

 미련과 우울함이 보란 듯이 뚝뚝 떨어지는 말들에 한태주가 비실비실 웃었다. 아, 뭐야 이게. 대놓고 먹어 달라는 티를 내는 사람들이 밉지 않았다. 어이는 좀 없어도, 조금 웃겼고 많이 좋았다. 웃음을 감추지 않은 한태주가 마지못해 말한다는 듯 입을 열었다.

 "듣고 보니 허기지네요. 조금 더 먹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진짜?"

 대답도 듣지 않고, 네 사람이 아까의 우울한 분위기는 어디 갔냐는 듯 벌떡 일어나 부지런히 상을 차렸다. 식어버린 반찬들을 데우고, 술을 가져오고, 신이 나 노래를 흥얼거렸다. 집 안에 금방 훈훈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이제야 좀 파티 같네! 강동철이 슥 둘러보고 냅다 지른 말에 토를 다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기대 가득 담긴 네 쌍의 눈을 애써 피하며 한태주가 밥을 깨작깨작 집어 먹었다. 더 먹을 수 있기는 개뿔, 이렇게 쳐다보면 먹고 싶던 밥도 못 먹을 것 같았다. 하지만 먹지 않으면 이 시선들은 절대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걸 한태주는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 정도 장난 섞인 시선에 반응을 해주지 않을 정도로 한태주가 차갑지는 않았다. 갈비찜 조금, 미역국 한 숟가락, 잡채 한 젓가락, 김치 한 조각. 부른 배를 애써 무시하고 음식들을 꾸역꾸역 밀어 넣은 한태주가 드디어 밥까지 꿀꺽 삼켰다.

 "맛있네요."

 고개를 든 한태주의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네 쌍의 눈이 쾌재를 부르며 시선을 옮겼다. 배고팠던 만큼 밥을 한가득 퍼담는 손길들이 급했다. 한태주가 그 광경을 가만히 눈에 담았다. 넘칠 정도로 충분했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지금의 한태주는 모든 것이 충분했다. 정신없이 식사를 하는 식구들을 바라보며 한태주가 술을 홀짝거렸다. 2018년보다 도수가 강한 1988년 소주가 목구멍을 타고 내려갔다. 이제는 이게 조금 더 익숙했다. 그래, 한태주에게는 이제 이곳이 더 익숙했다.

 

 굶은 시간과 반비례하게, 식사는 금방 끝이 났다. 각자 부른 배를 두드리는 사람들을 지켜 보다가 한태주가 벌떡 일어나 아까 가져온 짐 쪽으로 향했다. 한참을 쪼그리고 앉아서 짐을 뒤지던 한태주가 예쁘게 포장된 상자를 들고 돌아왔다.

 '형사님, 이거 드세요.'
 '아 괜찮습....'
 '오늘 생일이라면서요. 태주 선물이기는 한데, 형사님도 태주니까. 오늘 감사했어요.'
 '...고맙습니다.'
 '뭘요.'

 한말숙이 태주를 위해 사 온 케이크였다. 아닌 척 한태주를 바라보고 있던 네 사람 중 조남식이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반장님 그게 뭐예요?"
 "이거, 한말숙 씨한테 받았어요. 생일 선물이라고."
 "케이크예요?"
 "네. 그, 아까 못 먹었으니까. 같이 먹을래요?"
 "네!"

 반쯤 누워있던 몸을 벌떡 일으킨 조남식이 주방으로 달려가 작은 접시와 포크를 내어 왔다. 생일에 케이크가 빠지면 안 되죠! 계장님 때문에 완전 망했다 싶었는데 하늘이 도우셨네요, 악! 쉴 새 없이 입을 놀리던 조남식이 강동철에게 뒤통수를 맞고 입을 다물었다. 그 모습에 한태주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조각 같이 걸린 웃음을 본 조남식이 그래도 좋다고 웃었다. 반장님 이제는 잘 웃으시네!

 

 

 강동철이 3분의 1, 이용기가 3분의 1 정도를 해치운 케이크는 금방 동이 났다. 그 뒤는, 당연하게 오징어와 술이었다. 나머지 사람들이 식사하는 동안 이미 술을 마신 한태주는 조금 알딸딸한 기분이 들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잔을 채웠다. 마지막으로 조남식까지 잔을 채우자 강동철이 잔을 높이 들었다.

 "자 그럼, 다 같이 한태주의 생일을 축하하며! ...야, 태주야. 오늘은 니가 해라."

 강동철의 말을 찰떡같이 알아들은 한태주가 망설이자 옆자리에 있던 이용기가 옆구리를 쿡 찔렀다. 윤나영은 웃으며 잔을 조금씩 흔들어 보였고, 조남식도 잔뜩 기대하는 눈빛으로 한태주를 빤히 쳐다봤다. 천천히 네 사람과 눈을 마주친 한태주가 술기운에, 혹은 부끄러움에 조금 붉어진 얼굴을 하고 크게 외쳤다.

 "아후!"
 "강력 3반!"

fin.

비보라(@03rainpurple01) 

​HAPPY BIRTHDAY
HAN TAE J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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