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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인

​오늘의 바깥

 

D-10957
1988. 08. 31.

촛불을 불면 어른이 될 수 있을까? 이사할 때 올려 둔 찬장 위의 사탕 상자들을 가늠하는 너는 여섯 살. 발돋움을 해도 닿지 않는 것들이 많다. 고모가 사 온 케이크 위에는 꼭 너만큼 키가 작은 초들이 늘어섰었다. 아빠처럼 키 큰 초는 아직, 멀리 갔다는 아빠도 아직이다. 어른이 되면 많은 것들이 손에 닿을까? 별나라에도 갈 수 있을까? 하지만 엄마는 어른이 아닌 것 같았다. 거짓말을 하면서 자꾸 울었으니까. 엄마는 그래도 안 울었다고 웃지만, 너는 언제나 엄마의 바람보다 조금 더 똑똑했다. 아빠 언제 와? 물을 때 엄마 눈이 빨개지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그럴 때면 너도 같이 엉엉 울어버리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엄마, 엄마, 울지 마. 생일 촛불을 불면 어른이 될 거야. 아빠 언제 오냐고 앞으로는 안 물어볼게. 엄마를 슬프게 하지 않을게. 이불을 머리 끝까지 덮고, 너는 숨을 죽였다. 딱 여섯 번째 생일이 끝날 때까지만 울자고. 그 다음부터는 절대 울지 않을 거라고.
 
 
D-5479
2003. 08. 31.
 
2인실짜리 방에는 비 냄새와 비 소리만 고조곤하다. 닫힌 문에 복도에서 들어오던 불빛도 허리가 잘리면, 너는 물 먹은 솜처럼 미적대며 침대 위로 가라앉았다. 너는 느리게 중얼거린다. 아무도 없네. 습한 공기에 어울리지 않게 버석거리는 목소리였다. 방은 꼭 달력의 한 칸만큼 좁았다. 케이크도 촛불도 마다한 네 생일처럼. 집을 떠난 생일이 겨우 두 번째인 너는 스물 한 살, 아직 네가 어른이라는 것이 생경하다. 언제부터였나, 너는 막연히 바랐다. 네 생일에 아무런 의미도 없기를. 그저 다른 여느 날과 같이, 아무도 들이지 않은 채 흘러가기를. 
빈 달력 한 칸. 단조롭고 당연하게 오늘은 내일로 이어질 것이다. 똑같이 생긴 방들이 늘어선 이 복도처럼. 너는 생각한다. 빈 네모들이 늘어선, 영 올 것 같지 않은 미래를. 그 동안 몇 번의 문을 열고 닫을 것이다. 한때는 고모와 어머니가 있던 집이었고, 지금은 기숙사 2인실의 홀로 된 방. 너는 비 들이치는 들창마저 닫아버리다, 문득 깨닫는다. 언젠가 너는 완전한 혼자가 되어 방에 들어서게 될 것이다. 네게는 이제 외로워지는 일밖에는 남지 않았다. 어쩌면 너는 그것을 기다렸었다. 그런 기분이 들었다.


D-0
2018. 08. 31.

바닥에 깔린 네 그림자가 수없이 짓밟힌다. 발을 빠르게 놀리는 행인들 한가운데 너는 고개를 숙인 채다. 개미떼가 죽은 매미에게 몰려들고 있었다. 고요하고 치열하다. 너무 맹렬한 나머지 소음에 먹히는 것만 같다. 저 매미도 한때 울음을 쏟았을 것이다. 매미 소리는 소나기처럼 퍼부어 다른 소리들을 지워 버리곤 했다. 소란함과 고요함은 언제든 닮았다. 네 환상이 현실에 오래 남아 머무르듯이.
고개를 들면 너는 아무도 걸음을 늦추지 않는 거리에 있다. 눈맞춤도 건네는 말도 없이 사람들은 무신경하게 너를 스친다. 한때, 너는 진심으로 외로워지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태어난 것을 축하하는 일 없이, 오늘에서 내일로 이어질 뿐인 날들을 지나고 싶었다. 네가 바라던 대로다. 네 생일은 꼭 그만큼 비좁고 공허해졌다.
그러니 이 소란스러움은 아마도, 네 오늘이 너무 조용하기 때문이다. 두런거리는 목소리들이 매미 소리처럼 귀를 맴돈다. 익숙한 뒷모습들이 하나 둘씩 너를 돌아보고 웃는다. 반장님. 서울 놈. 태주야. 이게 뭘까, 당신들은 뭘까. 너는 마음이 무너지는 소리를 듣는다. 이것은 알면 안 되는 감정이었다. 깨달음이 너무 늦은 너는 서른 여섯. 좁아진 삶만큼 느려진 걸음이 물웅덩이로 고인다. 입을 막고 웅크리는 네 등은 낮게 죽인 숨으로 들끓는다. 고요하고, 소란스럽게.


D-10957
1988. 08. 31. 

늘어선 달력 속 사각형들처럼, 익숙하고 지리멸렬한 혼자가 되어 오늘에서 내일로 옮겨 가는 것. 그게 삶의 전부라고 너는 한때 생각했었다. 그러나 너는 서른 여섯 살, 촛불을 불고 어른이 되어야 했던 여섯 살이 아니라. 지병처럼 따라붙던 외로움을 이제서야 눈치채는 늦은 네가 서른 해 전의 네 생일에 깃든다. TV에서 튕겨 나온 다이얼을 집어 들며, 너는 문득 중얼거린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해. 언젠가는 누군가가 이 말을 해 주길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늘 가장 좁은 방에서 홀로가 되고 싶더니, 오늘은 어쩐지 누구에게 무슨 말이라도 걸고 싶은 기분이다. 생일이니까, 그러니까 이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한다.
이 정도는 괜찮다. 어쩌면 모든 것이 네 믿음대로 되지 않는 것은 다행일지도 모른다. 수선스러운 소리가 들려 문을 열었을 때, 너는 가장 많이 그리워했던 것을 본다. 야 임마 쪼잔한 새끼야, 케익도 좀 큰 거 사 오라 그랬잖아. 아 그럼 어떡해요, 모카 케익은 이거 밖에 없다는데. 쉿, 다 들리겠어요. 옴마야. 형님, 이거 라이터 가스가 다 됐네요. 아이 씨, 불 붙은 걸로 적당히 옮겨 붙여! 그러면 촛농 떨어져요, 계장님……. 숨을 죽이며 아옹다옹 케이크에 초를 붙이다, 문을 열고 나온 너와 함께 어안이 벙벙해져 버린 사람들을. 


D+0
1988. 08. 31.


큰 초 세 개와 작은 초 여섯 개, 둘러앉은 사람이 다섯. 놀래키기는 틀렸으니 불이나 끄라는 말에, 너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만다. 한때, 너는 진심으로 외로워지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외롭지 않아도 되는 날들을 바랐던 것인지도 몰랐다. 언제부터 따뜻한 것이 무섭지 않았더라. 네게 집중된 시선들에 눈을 맞추는 너는 서른 여섯 살. 답은 너무 명백해서, 너는 잠시 옅게 울렁이고 만다. 스위치 옆에 앉은 너를 채근하는 눈들이 웃고 있다. 불을 꺼도 여간 꺼지지 않을 것 같은 눈빛들이다. 촛불의 따스함이 그런 것처럼 말이다. 너는 스위치로 손을 뻗는다. 전등을 끄면 어스름한 빛들이 대신 켜질 것이다. 아주 먼 길을 떠나 결국 돌아왔다는 생각과 함께, 너는 오늘을 켠다. 사실은 그토록 바랐던 오늘을. 

파인(@feyn_on_mars) 

​HAPPY BIRTHDAY
HAN TAE J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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