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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맨 김화석

tied

♬ ASO-Snug

 

  이 순간을 영원히… 아름다운 마음으로 미래를 만드는 우리들의 푸른 꿈…

 

  도로를 지나는 차의 카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시끄러운 노랫소리가 데크레셴도로 서부서의 창을 뚫고 날아들었다. 멀어지는 소리는 이내 희미해지고, 그 자리를 거친 매미 울음소리가 채웠다. 1988년도 인성의 늦여름. 태주는 그 여름 속에 있었다. 8월의 막바지인 계절은 태주의 시간이 이곳에 있음을 알렸다. 그가 이곳으로 되돌아온 지 벌써 몇 주째. 이곳에서의 나날들은 스스로의 선택이 옳았음을 확신하기에 충분했다. 한창인 계절에 너나 할 것 없이 지치는 요즘이었으나 태주는 계절이 선명할수록 생기를 되찾는 듯했다.

 

  다시 돌아왔다. 자신의 현실이자 무지개다리 저 편인 이곳으로. 돌아온 88년도는 그의 행복이었고 누가 뭐래도 그의 현실이었다. 행복에 웃음 짓는 날들이 늘어 갈수록 그는 종종 의심하곤 했으나, 선연히 느껴지는 오감을 이유로 고개 드는 의심의 발밑을 단단히 부여잡았다. 살아있지 않다면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 그렇지만, 살아있다면 느낄 수 있으니까. 불과 몇 달 전에 있었던 대화를 떠올리곤 새삼 이곳이 제 현실임을 깨닫는다. 현실이 아니라면 느껴질 리가 없는데, 이리도 생생히 느껴지니. …내리쬐는 볕이 뜨겁다. 책상에 기대 걸터앉아있던 태주는 창으로 드는 볕을 몸을 살짝 틀어 피하곤 사건 브리핑이 한창인 블랙보드에 눈길을 주었다. 그가 잠깐 정신을 판 사이 가닥이 잡혀 이야기가 끝이 났는지 다들 잡담 중이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상황을 살피는 태주가 동철의 눈에 들었나보다. 용기에게 하던 잔소리의 화살표가 태주에게로 향했다.

 

  "어이, 한태주. 너는 이 불볕더위에 덥지도 않냐? 수사반장 찍냐? 맨날 그놈의 재킷. 보는 내가 더워서 뒤지게 생겼다. 서울에선 그게 유행이냐? 아님 서울은 봄 다음에 바로 가을이야?"

 

  하여간 서울놈 아니랄까봐 깍쟁이 티내고 있어. 그리고 인마, 너 왜 또 넥타이 안 했어. 직장에 오는데 넥타이도 안 하고 오냐. 까칠하게 툭툭 내뱉지만 태주는 그런 동철의 화법이 나름의 표현방식임을 알았다.

 

  "계장님, 저 더위 먹을까봐 걱정하시는 겁니까? 괜찮습니다. 저 더위 잘 안 탑니다. 그리고 전 뭘 어떻게 입어도 태가 나서요."

 

  제 패션에 신경 꺼주시죠. 태주가 그의 타박을 뻔뻔하게 받아치자 동철은 기가 차다는 듯 허, 하고 코웃음을 쳤다. 저 녀석 적응됐다고 말하는 모양새 봐라, 저거. 동철이 툴툴대는 모습을 대꾸 없이 지켜보던 태주의 시선이 흐르듯 어딘가로 향한다. 한 곳으로 머무는 그의 눈길이 퍽 자연스럽다. 시선이 향한 곳은 나영이다. 물끄러미 나영을 바라보는 시선이 꽤 오래 머무른다. 웃음기 어린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나영은 용기와 남식이 평소처럼 투닥이는 걸 옆에서 미소를 띤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분위기인데, 무언가 달라 보인다. 태주는 한참 나영을 들여다보며 생각했다. 나영은 빤히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는지 일순 고개를 돌려 태주를 마주본다.

 

  "왜 그러세요, 반장님?"

 

  눈이 마주치자 그대로 눈을 접어 웃어 보이는 나영에 태주는 잠시 간 말이 없다 고개를 천천히 내저었다. 아닙니다, 아무것도. 그리고 눈을 돌려 별 것 없는 사건 보고서 문서철이나 뒤적거릴 뿐이었다. 때마침 동철의 잔심부름이 떨어지자 나영은 고개를 한번 갸웃하고 도도도 다른 쪽으로 향한다. 태주는 눈을 여전히 서류에 고정시킨 채로 작게 숨을 내쉰다. 그렇게 별 일 아닌 척 또 순간을 넘긴다. …조금 이상했을까. 이상할 것도 없는 상황인데 태주는 못내 신경이 쓰였다. 이 지금만 떼어놓고 보면 정말 별 일 아닌 일상처럼 보일 테지. 그러나 이런 적이 지금 말고도 몇 번 더 있었으니 그건 조금 이상해보일지도 모르는 문제였다.

 

  그랬다. 요즘 따라, 자신이 좀 이상했다. 변함없는 일상, 그 사이 사이의 공백에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면 자신도 모르게 눈으로 나영을 항상 좇고 있다. 이상한 일이었다. 저도 모르게 멍하니 나영을 바라보다 눈이라도 마주치게 되면, 그녀가 제게 내미는 별 뜻 없는 상냥함에 남몰래 당황하게 된다. 어린애처럼 하나하나에 놀라고 반응하는 것은 물론 아니었지만, 잔잔한 수면에 작게 파문이 이는 것처럼 이따금씩 놀라곤 한다. 자꾸만 시선이 가는 나영과, 그런 나영을 보고 있는 자신에게.

 

  왜 이럴까 싶다. 요즘 들어 이 문제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내가 왜 이럴까. 자신만 아는 이상한 점이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말하자면, 나영의 행동이나 말이 신경 쓰였다. 언제부터 이랬는지도 모르겠다. 떠올려보면 꽤 오래 전부터. 딱 잘라 시점을 말할 수는 없는, 그러나 천천히 스며든 것 같은 그 순간들부터. 내가 왜 이럴까. 스스로에게 모르는 척 질문을 던져본다. 의외로 답은 곧장 돌아온다. 사실은 알고 있다. 왜 이러는지. 알아채지 못하기에는 그는 너무나도 어른이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끌림이었다. 일련의 사건들과 불안정한 상황들 때문에 가려져 있던 것이 모든 게 가라앉자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범인을 잡을 때처럼, 지나온 흔적을 돌이켜보면 명확한 프레임이 그려진다. 곳곳에 남겨놓은 감정들이 단서처럼 제 마음 한 곳을 가리킨다. 나영의 미소가 요즘 들어 더 예뻐 보인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뭘 그렇게 또 멍 때리고 있냐. 인마, 피곤하면 좀 가서 쉬어. 억지로 일하는 척 월급도둑 하지 말고. 마음이 콩밭에 가있는데 몸만 여기 와서 쑈하고 있네."

 

   동철이 태주에게 다가가 서류철을 뺏어들어 태주의 가슴을 툭툭 쳤다. 상념에 젖어있던 태주는 동철을 빤히 쳐다보았다.

 

  "맞습니다, 반장님. 지금 반장님 억수로 피곤해보이십니다. 아무래도 쉬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남식아, 반장님 다크서클 내려온 게 어디 하루 이틀 일이냐? 맨날 피곤해보이시는데 뭘 새삼 그렇게 걱정하고 있어. 흠흠. 그래도 정 피곤하시면 먼저 퇴근하시죠, 반장님."

 

  "…퇴근시간 얼마 안 남았네요. 사건 파일들 집에 가져가서 마저 보겠습니다. 먼저 퇴근하겠습니다."

  

  그리고 태주는 책상에 기댄 몸을 일으켰다. 지나친 걱정과 참견 고맙습니다, 다들. 저희 어머니신 줄 알았어요. 언제부터 절 그렇게들 아끼셨다고. 그 말을 남기고 태주는 동철 손에 들린 보고서를 다시 낚아챈 후 가방과 보고서들을 챙겨 서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

 

  조금 생각에 정리가 필요할 것 같아서였다. 혼자서라도 나선 건.

 

  집에 도착해 사건 보고서를 들여다보아도 영 집중이 되지 않았다. 이곳으로 오기 전의 자신은, 스스로도 냉정하고 차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보다. 이곳에 와서 자신이 참 많이도 바뀌었지 싶다. 그 동안 잊고 있던 감정들을 비로소 깨닫게 된 거겠지. …오늘은 정말로 마음 정리가 필요한 날이었다. 누군가 사람을 불러 어울리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건 어른으로 살아온 시간동안 혼자인 시간이 긴 탓이었을까. 그도 아니면 자꾸 생각나는 한 얼굴이 있기 때문일까. 어찌되었든 태주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가끔은 이런 것도 의미가 있다. 그래서였는데. 태주는 지금 그 선택이 괜한 선택은 아니었나 후회하고 말았다. 홀로 인성상회에 발걸음 한 건 좋은 선택이 아니었던 것 같다. 혼자서 마실 요량이었다면 다른 곳을 골랐어야 했는데, 바보같이. 늘 가는 곳이 익숙해서 이곳에 온 게 잘못이었다.

 

  태주가 입구에 들어서 자리를 둘러보면, 태주의 시야에 들어오는 익숙한 얼굴 둘. 태주가 아주 잘 알고 있는, 붉은 조명 아래 대화를 나누고 있는 두 남녀. 남식과 나영이었다. 조 경장과 윤 순경이 왜 저기에 있을까. 둘이 앉아있는 테이블을 한번 쳐다본 태주는 둘이 술을 마시는 중이란 걸 알아챘다. 처음엔 자신을 빼고 회식이라도 온 건가 했는데. 분위기를 보아하니 그런 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테이블 위에 잔은 두 잔뿐이었다. 그리고 둘은 제법 흥이 오른 듯했다. 많은 말들이 음악과 함께 섞여 웃음소리를 달고 이리저리 흩어지고 있었다. 말을 나누는 둘은 그야말로 단 둘이었다. 퇴근 후 다소 늦은 시간. 둘만의 술자리. 무표정한 얼굴로 침착한 척 마음을 가라앉혀본다. 아마 별 일 아닐 것이다. 둘은 직장동료 관계이고, 동료들끼리 퇴근 후 술잔을 기울이는 일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팀 분위기를 따졌을 때, 서로 한잔 걸치고 싶을 때 찾는 상대가 서로일 것도 어느 정도 예상 가능한 범위였다. 그 정도의 친분이 둘 사이에 있을 법 했다. 나이대도 잘 맞고, 팀 내에서 막내라인이었으니. 공감대를 형성할 거리도 많을 터였다. 논리적으로 충분히 일어날 법한 일이었다. 그러니 별 일은 아닐 것이었다. 그럴 게 분명했다. 그렇지만, 별 일 아닐 거라는 생각과는 달리 태주는 어느새 몸을 돌려 그곳을 빠져나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 둘의 만남에 매우 동요한 듯. 서둘러 도망치듯 자리를 떠나는 자신을.

 

  눈에 콱 박힌 웃음 때문이었다. 변명을 하자면 그랬다. 나영의 웃음이 조명 아래서 빛을 더하고 있어서. 그래서. 늘 그랬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웃음이 예뻤다. 남식과 있을 때의 그녀의 웃음이 평소보다 밝아보였다.

 

  데이트일까.

 

  문득 머릿속에 데이트가 아닐까 하는 가설이 세워지자 태주의 머릿속으로 그 가설의 타당성을 입증하려는 시도들이 무수히 쏟아진다. 물론 대부분은 자신의 망상일 뿐이었다. 정황 증거고 뭣도 없지만 제 마음 속에 피어난 의구심 하나로 만들어지는 망상. 그동안 자신에게 이곳에서의 시간들이 그랬던 것처럼, 상황은 그대로 거기 있지만 제 마음가짐에 따라 제 눈에 색안경이 쓰인 듯 그렇게 보고자 하니 상황이 그렇게 흐르는 듯 했다.

 

  원래라면 비논리적이고 비합리적인 추측은 멀리 하는 게 옳았다. 한태주는 그런 사람이었다. 진실과 사실, 옳고 그름이 자신의 감정보다 우선인 사람. 그것이 곧 자존심이고 자신을 이끄는 길인데. 왜인지 지금의 그는 스스로 구덩이를 파두는 꼴이다. 흔히 말하는 삽질. 평소대로라면 동요하지 않고 냉정을 유지했을 텐데. 섣부른 판단이나 결론을 내리지도 않을 테고, 아무렇지 않게 둘 사이를 자연스레 파고 들 수도 있었을 테다. 혼자이고 싶었기에 간단히 인사를 건넸다거나. 그런데 꼴사납게 제 눈을 가리기로 했다. 도망쳤고, 회피했다.

 

  두려워서였다. 단순한 동료관계로 일축할 수 없을까봐. 그럴 듯해 보이는 동료관계가 사실 자신의 변명과 같은 허울 좋은 말뿐이라면. 색안경을 벗어도 똑같은 색일까 두려웠다. … 생각이 엉킨 실타래처럼 뒤섞이는 밤이었다. 인성상회. 네온사인 불빛을 지나는 태주의 발아래 희미한 그림자가 천천히 제 주위를 돌았다.

 

  ***

 

  그 밤이 있은 후부터 태주는 한층 더 예민해졌다. 한 동안 괜찮아보였던 그의 원체 예민한 성질과 병약한 기질이 다시금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멍하니 상념에 잠기는 일도 잦아졌다. 누군가 부르면 그제야 마른세수를 하며 정신을 차렸다. 미안합니다, 어디까지 이야기 했죠? 그의 이런 상태가 며칠이나 계속 됐다. 혈색이 제법 돌던 얼굴 위로 피곤함이 그림자처럼 드리우고, 그런 얼굴로 요즘 따라 더욱 조용해져서는 때로는 가만히 3반 동료들을 지켜보기도 했다. 남식은 며칠 전과는 사뭇 다른 태주의 분위기에 이상함을 느꼈다.

 

  "이 형사님. 반장님 저러시는 거… 교통사고 후유증 때문일까요? 설마 아직도 후유증 때문에 힘들어 하시는 거면 우째요."

 

  "낸들 알겠냐, 인마. 됐어. 냅둬. 애새끼도 아니고 알아서 하시겠지."

 

  저들끼리 속삭이다가, 용기는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태주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건넸다.

 

  "반장님 요즘 뭐 안 좋은 일 있으십니까? 얼굴이 꼭 전 애인한테서 청첩장 날아온 사람 같은데. 아주 죽상입니다?"

 

  태주는 넋을 놓고 있다 그의 말에 고개 돌려 한번 무심한 눈길을 주고 다시 책상 위 작성하던 서류로 고개를 돌렸다. 어유, 어유. 밥맛 떨어지는 건 저렇게 한결 같은데. 재수 없는 거 보니까 아주 죽을 정도는 아닌갑다. 안 그러냐. 어색하게 남식은 고개를 끄덕였고. 예, 그래도 반장님이 기운이 좀 남아계신 것 같아서 그나마 다행이네요. 모레까지 기운 없으셨으면 진짜 큰일… 아, 맞다. 남식은 입을 틀어막고 태주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고는 어색하게 미소를 흘렸다. 그러나 태주는 여전히 넋을 놓고 있는 중이었다.

 

  "반장님."

 

  그런 분위기를 가로질러 나영이 각종 보고서와 자료를 한 아름 들고 와 태주의 책상에 올려놓았다.

 

  "부탁하신 자료들이에요. 이 사건과 관련이 있어 보이는 자료들로만 추려 왔는데, 이 사건들과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요? 제대로 말씀해주시면 다른 자료들도 더 알아봐드릴 수 있어요."

 

  똑부러지는 나영의 목소리에 태주는 정신을 차려 고개를 올려다보았다. 나영은 태주와 눈이 마주치자 말갛게 웃어 보이며 눈에 의문을 띄웠다. 잠시 간 그 시선 마주하던 태주는 애써 눈을 피하곤 보고서들을 정리해 책상 한 켠으로 밀어놓았다.

 

  "…범인이 피해자들을 특정해 선별한 기준이 있을까 해서요. 겉으로 봐선 피해자들의 공통분모를 파악할 수 없어서, 이와 비슷한 사건의 경우들에서 나타나는 범인의 심리적인 특징을 유추할 수 있을까. 그걸 찾아보려고 했던 겁니다."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조금 건조한 듯하나 부드러운 어조였다. 아무렇지 않은 듯 널어놓았던 감정들을 주워 담고, 갈무리한다. 사적인 감정을 최대한 자제해 나영을 대하는 태주는 어쩐지 인내심이 바짝 마르는 기분이었다. 아직까지도 정리되지 않은 마음들 때문에 복잡했다. 나영에 대한 호감을 자각한 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그것만으로도 자신에겐 풀리지 않는 문제일 만큼 벅찬데. 나영은 남식과 어떤 사이일지 알 수 없었다. 그 밤 이후로 말하지도 못하는 의문만 늘어간다. 묻고 싶었다. 그러나 어떻게 물을 수 있을까. 나영의 사적인 영역에 들어갈 만큼의 사이는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불안한 것이겠지. 남식은 이미 그 사적인 영역에 속해있으니. 자신은 알 수 없는 영역에. 방법과 타이밍의 문제도 문제였다.

 

  그렇지만 가장 큰 문제는 자신의 두려움이었다. 소중한 것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 태주의 인생은 상실의 연속이기도 했다. 어릴 적 사랑하던 아버지를 잃었고, 그 이후의 삶은 결핍의 연속이었다. 정 붙일 곳도 없었다. 자신에게 남은 건 그저 일. 프라이드를 지켜내는 것. 스치듯 지나간 사랑도 있었다. 진심이었으나 자신의 치유되지 못한 면들을 그 사랑이 치유해주지도, 그런 자신이 그 사랑을 잡을 수도 없었다. 이미 지나간 인연. 상실. 이곳에 와서는 진실을 얻었으나 붙잡고 있던 미화된 추억을 잃었다. 그리고 지금에서야 소중한 사람들이 생겼다. 잃을 뻔 했지만 나의 현실이었던 곳, 내 가족을 버리고서야 다시 찾은 것이었다. 그리고 이제, 더욱 소중한 것이 생길 참이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자연스레 다가온 마음이었다. 그것마저 잃고 싶지 않았다. 확인사살을 당하면 또 한동안은 방황하지 않을까. 제게 소중했던 온기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그건 용납되지 않을 것이기에.

 

  그러나 의문점은 계속해서 태주의 신경을 건드린다. 집요하게, 계속해서. 마음 한 구석을 쿡쿡 찌른다. 그 날 남식과 나영은 왜 둘만의 자리를 가졌을까. 둘은 정말 서로에게 호감을 가진 걸까? …정말로 두 사람이 만나는 사이인 걸까.

 

  "그러시면 제가 관련 자료를 더 찾아서 올게요. 아마… 내일 중으로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 태주의 심정을 알 리 없는 나영이 잠시 눈을 굴려 저가 할 일을 떠올리는 듯 하더니 활짝 웃으며 답했다. 밝은 미소. 그 얼굴에 태주는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다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저기, ……."

 

  "예? 더 하실 말씀 있으세요?"

 

  조 경장과는 어떤 사이인가요? 하마터면 저도 모르게 내뱉을 뻔한 말을 꾹 눌러담고 태주는 어쩔 수 없이 옅게 미소 지었다. 너무 무리하지 말라는 말을 하려던 거였습니다. 둘러대는 태주의 표정이 그리 좋진 않았다. 고마워요. 그렇게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어이, 짜식들아. 일하자! 다 모여."

 

  동철이 계장실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블랙 보드 앞으로 전부 모일 것을 명했다. 브리핑 시간이었다.

 

  "이번 사건은 부녀자 납치 금품갈취 사건인데, 납치 후에 피해자 송환을 대가로 금품 상납을 요구하는 짓거릴 했어. 쓰레기 같은 놈덜. 신고 접수된 피해가 네 건이나 되는데 말이야…"

 

  동철의 사건 개요 설명을 필두로 수사 대상과 방향, 전담 업무 등을 한창 브리핑 받는 중이었다. 태주는 제 책상에 걸터앉아 진지한 낯으로 사건 브리핑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 용기가 근처 중고차 매매소에 가서 차량판매기록 대조해서 조회해보고, 남식이 너는 그 날 또 다른 목격자가 있는지 인쟁동 일대 탐문수사 시작해. 나랑 한태주는 용의자새끼 집으로 수색 나갈 거다. 그리고 미스 윤은…"

 

  일사불란하게 작전 지시를 내리던 동철은 나영에게 어떤 업무 지시를 내리면 좋을까 하는 표정을 하곤 잠시 생각에 잠겼다. 서를 지키라거나, 서를 지키라는 지시가 내려지겠거니 생각하던 나영은 무언가 다른 할 말이 있는 듯한 동철의 기색에 눈을 빛내며 집중했다.

 

  "서 지키면서 추가적인 보고가 들어오는 대로 연락 주든가…"

 

  그 동안 3반에서 나영의 활약이 꽤 컸기에 동철도 나영의 인력을 좀 더 다른 곳에 쓸 수 있지 않을까 고민하는 듯 했지만 이번 사건에서 어떤 인력 배치를 해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는지 역시 늘 같은 지시를 내리려는 듯 보였다. 그 찰나, 남식이 나영을 한번 쓱 쳐다보고는 손을 들어 동철에게 건의했다.

 

  "계장님. 제 생각에는 윤 순경님도 탐문수사에 동참하시면 좋을 것 같은데요. 인쟁동이 관할구가 워낙 방대해서 혼자 탐문수사 하기에는 좀 어려움이 있습니다. 윤 순경님이랑 같이 나가면 좋을 것 같습니다."

 

  같이, 라는 단어에 강세를 주는 남식에게 태주가 흘끗,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 나영을 한번 쳐다보았다. 나영의 얼굴이 조금 상기된 것 같아 보인다.

 

  "그래? 그럼 남식이랑 미스 윤이랑 같이 가. 응. 둘이 딴 길로 새고 그러진 말고. 데이트 하러 가는 거 아니다."

 

  그렇게 말하며 동철은 태주를 바라봤다. 뭘 봅니까, 하는 표정으로 시선을 맞받아치는 태주의 속은 왠지 모를 짜증이 들어찼다. 남식과 나영이 붙어있는 게 신경이 쓰이는 마당에 남식이 굳이 나영과 탐문수사를 나가겠다 하니 더욱 의식이 되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서로가 서로를 챙겨주고 끌어주는 것이 동료이건만 태주는 그게 순전히 동료애에 기반을 둔 것인지, 그 이상의 것인지 알 수 없어 답답했다. 그런 태주의 속을 마치 다 안다는 듯 동철이 태주의 어깨를 은근히 끌어안고 약 올리듯 넌지시 말했다.

 

  "왜 그래, 한태주. 막내 둘이서 데이트 나간다니까 억울하고 막 다 짜증 나냐? 어이구. 질투하는 것 좀 봐라. 억울하면 너도 연애 같은 거 좀 하고 그래. 인생이 칙칙하다고 어디 직장까지 와서 얼굴 칙칙하게 있으래."

 

  "그런 거 아닙니다."

 

  "아니긴. 얼굴 팍 구겨져서는 아주 인상파 화가다."

 

  "계장님은 거울 안 봅니까?"

 

  "나는 거울 보면 후회가 들어서 안 봐. 내가 왜 탈렌트가 안됐나, 하는 후회가. 하!하!하!"

 

  태주는 할 말을 잃고 고개를 내저으며 제 어깨에 감긴 동철의 손을 거칠게 때렸다. 짝, 하는 소리가 크게 날 정도로 세게 때려 동철은 아프다고 소리를 질렀다. 서울놈, 농담 한번 했다고 거 지 상관을 이렇게 때리냐. 그러든지 말든지 태주는 마른세수를 하고 곁눈질로 나영을 바라보았다. 나영의 옆에 남식이 어느 샌가 다가와 말을 붙이고 있었다.

 

  "윤 순경님, 그러고 보니 오늘 감식반에 증거품 제출하러 가신다 하지 않았어요? 오늘 증거품들이 무게가 쫌 마이 나가던데 제가 같이 가드릴까요?"

 

  남식의 친절한 권유에 나영이 고민하는 기색을 띤다. 그 얼굴에 왠지 모르게 짜증이 치솟아, 저도 모르게 말을 끊어 대화에 끼어들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조 경장이 올린 기록지에 몇 가지 잘못된 게 있던데… 퇴근 전까지 수정해야 할 것 같으니 감식반 증거품 제출은 제가 대신 가겠습니다."

 

  남식은 자기가 그랬던가, 싶어 고개를 갸웃했지만 일단은 그렇다고 하니 아, 그래요? 죄송합니다. 다시 확인해보겠습니다. 하고 입술을 축 늘어뜨리고 자리에 돌아갔다. 태주는 남식이 자리로 돌아가자 나영을 보고 조심스레 눈치를 살폈다.

 

  "내가 조 경장 대신 도와줄게요. 언제 출발하면 될까요."

 

  "네? 아… 지금 막 출발하려고 했어요."

 

  "그럼 가죠. 책상에 있는 저게 다입니까?"

 

  "네, 그런데 저 혼자 가도 괜찮은데…"

 

  "아닙니다. 무거운 것들이 많다면서요. 어차피 감식반에 다른 볼 일도 있었습니다."

 

  다른 볼 일, 무엇? 실은 아무 일도 없지만 그렇게 둘러댄 태주는 나영의 책상에서 무거운 상자를 하나 안아들어 나영을 바라보았다. 그냥, 곁에 두고 싶어 그랬다. 질투가 원인이었나. 잠시라도 남식과 나영이 아닌 자신과 나영이기를 바랬다.

 

  "…항상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반장님. 정말로요."

 

  나영이 자신을 올려다보며 감사를 표했다. 그녀의 진심어린 말에 태주는 엄한 생각을 접었다. 가시죠. 네! 나영이 서둘러 나머지 증거품들을 챙겼고 둘은 나란히 문으로 향했다. 제법 사이가 좋아 보이는 둘의 그런 모습을 동철이 턱을 긁으며 바라보고 있었다.

 

  ***

 

  나영과 감식반에 다녀오는 길은 평소보다 조금 더 어색했고, 평소보다 조금 더 포근했다. 몇 마디 말은 별로 나누지 않았지만 나영의 웃음은 보기 좋았고. 자신과 있을 때의 나영의 눈은 자신을 향했다. 평소보다 의식했기 때문인지 대화는 그리 길게 이어지지 못했지만. … 퇴근 후 집으로 돌아오며 태주는 한숨을 내쉬었다. 나영의 존재가 점점 더 의식된다. 그리고 그럴수록, 그 밤 남식과 있던 그 모습도 더욱 마음에 걸린다. 여전히 둘이 어떤 사이인지도 알지 못하면서 오늘 주책맞게 질투가 나 일부러 심술을 부렸다. 이렇게 유치한 인간이었나.

 

  사실 자신은 참 유치한 인간이었다. 그러니까, 애착을 가지게 되면 다소 집요하게 군다. 집착적이라는 말이 더 알맞을까. 한 마디로 외골수란 말이었다. 한태주라는 사람은 그랬다. 아버지와의 추억은 도저히 버릴 수 없기에 상자에 담아둔다. 3반과의 추억은 잊을 수 없기에 추억 속을 자신의 있을 곳으로 정한다. 범인을 붙잡아 눈앞에 두었어도 검거하는 방식에 석연치 않은 구석이 한 군데라도 있다면 옳음을 위해 다음을 기약한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길은 곧 죽어도 바른 길이다. 그게 태주 자신이 걸어야만 하는 길이었다. 그렇게 올곧은 태주이기에, 이끌리는 마음을 거스를 수 없기에 유치하고 비겁해도, 아무리 무서워도 그 마음이 가는대로 자신은 가야했다. 그게 한태주의 방식이다. 그리고 그 고된 방식이 오늘따라 더욱 고되다. 오늘 하루가 참 힘겹다. 보고픈 얼굴이 빈 자리는 쓸쓸했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현관에 들어선다. 다시 찾아오는 혼자만의 시간. 남은 하루를 고독 속에서 보내며 오늘은 좀 더 마음을 가다듬어 볼 참이었다. 분명 그럴 참이었는데…

 

  "…계장님?"

 

  "어, 한태주. 이제 오냐? 일찍 안 오고 뭐해. 할 것도 없는 놈이."

 

  문을 열기 전 어쩐지 말소리 같은 게 들리더라니. 동철이 티비를 틀어놓고 편한 옷차림으로 주인도 없는 이부자리에 누워 베개에 다리를 훌렁 올려 죽부인 안듯 끌어안고 있었다. 속옷과 러닝셔츠 차림에 긴 양말을 신은 꼴은 뭡니까. 차마 하지 못한 말 속으로 삼키고 어이없다는 듯 동철에게 눈 흘기는 태주였다.

 

  "뭐하십니까, 여기서. 아니. 그 전에 어떻게 들어오신 겁니까."

 

  "천하의 강동철 계장님께서는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지. 놀랄 것 없어. 뭐냐, 주거침입죄 그런 거 따질 거면 재미없는 거 알지? 그나저나 배고파 죽겠다. 통닭 사왔는데 늦게 와서 다 식었잖아. 일단 와서 앉아. 닭 좀 뜯자."

 

  묻는 말에 답은 않고 닭 뜯는 소리나 하고 있다. 동철의 성미를 아는 태주는 또 한숨을 푹 내쉬고 상과 잔 두 개, 수저와 신문지 등을 꺼내 와 자리를 마련했다. 이불 좀 치워요. …아니, 그렇게 한 쪽으로 밀어두란 말은 아니었는데.

 

  실랑이를 벌이며 닭을 안주 삼아 술잔을 기울이기를 몇 번. 동철은 마냥 놀러온 듯 신변잡기적인 이야기를 하다 마침내 66년도 방콕 아시안게임 복싱 결승 경기 썰을 풀기에 이르렀다. 한참 억지로 듣고 있던 태주가 잔을 소리 나게 탁 내려놓고 말했다.

 

  "그거 회식 자리에서 매번 듣는 레파토리 아닙니까. 그래서 뭐요. 결국 은메달 따셨다고요. 축하합니다. 국위선양 하셨네요. … 그래서 오늘 오신 이유가 뭡니까. 보아하니 다른 할 이야기가 있으셔서 오신 거 같은데."

 

  동철은 닭 뼈를 들고 허공에 어퍼컷을 먹이는 시늉을 하다 태주의 단호한 말끊기에 얌전히 닭 뼈를 내려놓았다. 한창 이야기가 재밌어질 대목인데 싸가지 없게… 투덜거리던 동철은 곧바로 자세를 바로 잡고 빈 태주의 술잔에 술을 따랐다. 투명한 액체가 넘치기 직전의 위태로운 모양새였다. 장난스럽기만 했던 동철의 눈빛이 진지해지더니 태주를 관통할 듯 살폈다. 진중한 그 기색에 태주는 동철이 새삼 자신보다 긴 시간 동안 형사로써 살아왔음을 깨달았다.

 

  "미스 윤."

 

  "…윤 순경이, 왜요."

 

  갑작스레 나영이 거론되자 태주는 속으로 움찔하며 잔을 들었다. 나영의 생각으로 안 그래도 복잡한 머릿속을 동철이 콱 할퀴는 듯했다. 관록을 무시할 수가 없다. 눈앞의 남자는 예리한 한 마리의 들짐승 같다.

 

  "뭘 모르는 척 해. 윤 순경 때문에 그러잖아. 너 근무시간에 맨날 얼굴 죽상이고 신경질적으로 눈알 부라리고 한숨이나 푹푹 내쉬고 그러는 거."

 

  "아니, 그런 거 아닙니다."

 

  애써 부정해보지만 씨알도 안 먹힐 소리였다. 이미 그는 다 알고서 발걸음 한 것이었다. 아닌 척 해보아도 소용이 없었다. 태주는 체념하고 자신을 꿰뚫어보는 동철을 속으로 원망했다.

 

  "… …어떻게 아셨습니까?"

 

  "딱 보면 알지. 강동철 계장님은 눈에 천리안이 달려있어. 스캔 한 방에 조사하면 다 나와요. 니가 미스 윤을 좀 봤냐. 아주 뚫어져라 보던데? 이상야리꾸리한 눈깔을 하고선."

 

  "그런 거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냐. 너 윤나영 좋아하잖아. 아냐?"

 

  "…"

 

  이번엔 입에 침바른 거짓말이라도 그런 게 아니라 딱 잘라 말할 수 없었다. 궁지에 몰린 사냥감 마냥 숨도 멈춘 채 태주가 무언의 동요를 내비쳤다. 날카롭게 캐묻던 동철의 낯빛이 진심으로 자신의 후배를 걱정하는 선배의 얼굴로 바뀌었다.

 

  "한태주."

 

  태주는 말없이 그의 부름에 눈짓으로 답했다. 동철은 말을 이었다.

 

 "…넌 말이야. 일할 때나 그럴 땐 참 똑똑한 거 같은데 이럴 때는 영락없이 바보같아보여. 왜 남들 일엔 턱턱 다 알아서 이건 이겁니다, 저건 저겁니다. 감 놔라 배 놔라 잘난 척 잘하면서 왜 지 앞가림은 못해. 하여튼 헛똑똑이야."

 

  "…"

 

  "뭐가 그렇게 무서운데. 뭐가 그렇게 무서워서 알 거 다 아는 서울샌님이 눈 가리고 아웅하고 있냐고. 너도 어떻게 해야 할지 다 알잖아."

 

  겹겹이 껍데기를 두른 태주의 진심을 동철이 한 꺼풀씩 벗겨내고 있었다. 태주의 언 마음이 그의 앞에서 무장해제 되었다. 저 혼자 고민해보아도 풀리지 않던 생각의 타래가 동철의 걱정스런 조언에 하나씩 풀려가기 시작했다. 태주는 복잡함을 내려놓고 솔직한 심정을 허심탄회하게 말하기로 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뭘 어떻게 해야 하는 지. …어떻게 해야, 내가 더 이상 잃지 않을지를요. 저는 이 이상 무언가를 잃기가 싫습니다."

 

  많은 것을 잃어 본 태주의 본능적인 두려움이었다. 결핍과 상실. 그 고통과 아픔은 달랐으나 같았다. 그래서였다. 태주는 알고 있지만 인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뛰어들 수가 없었다. 잃지 말아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져서도 안됐다. 그것이 태주를 주저하게 만들었다. 태주의 머릿속에 조마담의 마지막 모습이 스쳐지나갔다. 천천히 붉게 물들어가는 하얀 원피스. 나는 그 앞에서 얼마나 마음을 졸였던가. 태주는 잔을 털어 넘겼다.

 

  "…뭐? 진짜 이거 바보 다 됐네. 잃기가 무서워서 아무것도 안 해? 바보냐? 그거야말로 너 자신을 잃는 거야. 우물쭈물 아무것도 안하다가는 포기한 것도 아니고 뭐 하나 질러본 것도 아니게 돼, 인마. 둘 다를 잃는 거라고. 그렇게 가만히 마음 죽이고 살면 그게 정말 괜찮기라도 할 것 같냐?"

 

  "…적어도 잃지 않으니 괜찮지 않겠습니까. 달리지 않으면 넘어질 일도 없습니다. 무릎이 깨져 피가 날 일이 없는 거잖습니까."

 

  동철의 말에 필사적으로 반박하는 태주였다. 무감각해지는 것. 그것마저 괜찮지 않으면 도망갈 구멍이 없어져버렸다. 태주는 힘겹게 말을 내뱉고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많이 힘겨워하고 있구나. 동철은 다 이해한다는 애정 어린 눈빛으로 태주를 바라보았다. 항상 옳은 길만 고집하던 한태주가 제 눈을 스스로 가릴 정도면 많이도 두려웠을 게다. 그러나 동철은 태주가 이대로 멈추길 바라지 않았다. 태주의 호흡이 진정되자 동철은 다시 말을 던졌다.

 

  "한태주. 그래도 꼴에 내가 선배라고 조금은 너보다 아는 게 있는데. 그게 뭔지 아냐? …그 동안 내가 살아왔고 내가 보아 온 인생이라는 게, 잃지 않고 싶어도 반드시 잃게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순간은 손에 잡히지 않고 변해. 멈춰있을 수 없으면 나아가거나 돌아가거나 해야지. 안 그러냐?"

 

  잘 생각해봐. 국민학교 학생한테 모르는 거 가르쳐주는 것도 아니고. 너도 체득한 인생 경험을 되짚어 주는 것뿐이니, 잘 알 거라 믿는다. 동철은 진지함은 이제 그만이란 식으로 닭날개를 뜯어 들었다. 태주는 여전히 말을 하지 않았다. 그의 말이 맞았다. 언제까지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망설일 수는 없었다. 실제로도 그러는 사이 남식과 나영의 기류는 변하고 흘렀다. 가진 적도 없는 것이 흘러가면 잃은 적이 없어도 혼자 남는 꼴이 되고 말 것이다. 태주는 인정하기 힘들었던 사실을 인정하기로 했다.

 

  "…계장님 말씀이 다 맞습니다. 저 윤 순경 좋아합니다. 동료로서, 그리고 이성으로도요."

 

  "이제야 좀 서울놈 답다. 솔직할 땐 솔직하잖아, 한태주. 싸가지 없을 정도로 당당하고."

 

  계장님만큼 솔직할까요. 계장님은 속옷 무늬까지 보여주실 정도로 너무 솔직하잖습니까. 호랑이가 자꾸 보니 정겹지 않냐.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분위기가 한결 풀어졌다. 후련했다. 우선은 단순하게 마음먹기로 하니, 편안했다. 태주는 제 쪽에서 먼저 동철의 잔에 술을 따랐다.

 

  "그래서, 네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뭔데. 다 필요 없고 다 떠나서 네가 진짜로 바라는 게 뭐냐고."

 

  다 끝난 줄 알았던 대화의 맥을 동철이 또 갑작스레 훅 치고 들어와 태주의 허를 찔렀다. 뭘 원하냐는 물음. 원해? 내가? 무엇을.

 

  "이야기 다 끝난 거 아니었습니까?"

 

  "끝이 있으면 새로운 시작이 있는 법이지. 그리고 너 이제 겨우 출발선에 선 거지, 뭐 경기 후루룩 다 끝난 거 아니다. 선배가 끌어줬으니 이젠 등 떠밀어줄 차례 아니냐."

 

  "원하는 거 없습니다. 그러니까 등 떠밀고 말고 할 것도 없습니다."

 

  없긴 개뿔. 없었으면 윤 순경 얼굴 빵꾸낼 것처럼 쳐다보지도 않았겠지. 동철은 속으로 코웃음치고 태주의 말을 오냐, 알았다는 표정으로 받았다.

 

  "진짜 원하는 게 없어? 허이구, 그러면 남식이랑 미스 윤이랑 둘 사이에 꽃피는 거 같을 때마다 살얼음 낀 표정으로 저 혼자 우중충해 있는 건 뭐냐. 원하는 것도 없는 연심이면 뭐 어디 삼류 영화 주인공이야? 청승떠는 소리. 그런 마음이 어딨냐."

 

  "…"

 

  "너 서울로 돌아간다 했을 때, 발령통지서 찢어발겼잖아. 그 땐 진짜 멋있어보였는데. 지금은 이게 뭐냐. …네가 원하는 대로 하면서 살아. 너 이렇게 우물쭈물하려고 여기 다시 돌아온 거 아니잖아. 아니냐?"

 

  태주는 그 말에 발령통지서를 갈가리 찢었던 일이 떠올랐다. 그 때의 자신은, 진심으로 이곳에 남기를 원했다. 그러자 행복했다. 솔직해지는 것이 모험이었대도 그는 결국 행복했다. 이 행복이 행복이 아니게 된다고 해도 확신을 얻은 순간이 후회스럽지 않을 터였고, 그 순간은 정말로 태주의 인생에 있어 몇 안 되는 홀가분한 순간이었다.

 

  솔직해져도 괜찮은 걸까. 스스로에게 물었다. 솔직해지지 않아서 나는 지금 더 괴로워.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보니 빼곡히 들어찬 마을의 조명 위로 까만 밤하늘이 도화지처럼 펼쳐져있었고, 은가루를 뿌려놓은 듯 빛나는 별들이 사각 창의 프레임에 걸려 있었다. 태주는 나영과 퇴근길을 같이 하던 밤을 회상했다. 나영의 웃음소리가 귓가에 퍼지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당신이 없는 지금도 나는 당신 생각에 이렇게 혼란스럽기만 하다. 눈앞에 두고 싶고, 곁에 두고 싶다. 한없이 신경을 쓰게 된다. 나는 당신을 원한다. 그래, 나영을 원한다. 조심스럽게 그러나 가볍지 않게.

 

  "…계장님."

 

  태주는 결심이 선 듯 아까와 달리 확신에 찬 단단한 목소리로 동철을 불렀다. 이제 좀 가닥을 잡았나보네.

 

  "굳이 부끄럽게 앞으로의 계획이나 포부 같은 거 주절거리고 그러지마. 난 다 떠먹여줬다. 이제 몰라. 너 알아서 해."

 

  남의 연애사 같은 거에 껴가지고 말이야, 이 나이 먹고 사랑의 큐우피드 같은 일이나 해야 하고. 나 참. 아니 오죽 답답하면 내가 이렇게 찾아와서 말이야. …그래도 정말 난 멋진 선배지, 이런 뒤치다꺼리도 해주고, 아주 멋있게. 크. 동철이 혼자 중얼거리며 밀어두었던 이불을 끌어 당겼다. 뭐해, 다 먹었음 빨리 치워야지. 집주인이 눈치가 그렇게 없으면 쓰나.

 

  …하긴 눈치가 없긴 하다. 아무리 걱정거리가 많아도 그렇지 어떻게 지 그걸 까먹냐. 마지막 말은 들릴 듯 말 듯하게 중얼거리는 동철을 태주는 잠자코 바라보았다.

 

  평소라면 날카롭게 받아쳤을 태주였지만 이번만큼은 동철이 고마웠기에 군말 없이 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이불을 편 채 나란히 누운 둘은 잠자리에 들 준비를 했다.

 

  "나 잔다. 너 코골지 마. 뒤척이지도 말고. 나 예민해서 그런 애들이랑 잠 못 자."

 

  그 말을 남기고 동철은 먼저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날 밤 태주는 동철의 코골이와 뒤척거림 때문인지 생각이 많아서인지 잠을 통 잘 수가 없어 밤을 다 샜다.

 

  ***

 

  1988년 8월 30일. 가장 먼저 출근해 보고서의 날짜를 또박또박 써내려가던 나영은 평상시보다 일찍 서 내부로 걸어 들어오는 태주를 보고 고개 들어 인사를 건넸다.

 

  "반장님,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이에요. 오늘은 일찍 출근하셨네요?"

 

  "…네, 윤 순경. 좋은 아침이네요. 오늘따라 눈이 일찍 떠져서요."

 

  눈이 일찍 떠졌다는 건, 수면시간이 짧았다는 말일까? 아니면 어제 일찍 잠들어서 일찍 일어나셨단 말일까? 잘은 모르겠지만 태주의 얼굴은 일단 잠을 잘 잔사람 같아보이지는 않았다. 피곤해 보이는 태주의 안색이 영 안 좋아 보여 나영은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반장님, 지금 굉장히 피곤해보이시는데. 커피라도 한 잔 드릴까요?"

 

  살가운 권유에 태주는 나영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옅은 미소를 지었다.

 

  "내가 할게요. …윤 순경도 커피 마실래요? 모처럼이니 내가 한 잔 타주고 싶은데요. …마시면서 할 말도 있고."

 

  하실 말씀? 무슨 하실 말씀이 있으신 걸까. 예상치 못한 태주의 말에 나영은 의아한 얼굴을 했지만 이내 잘 되었다는 듯 웃어보였다. 저도 할 말이 있었으니 마침 잘 되었다. 어떻게 화두를 던질까, 고민하던 차에 먼저 물꼬를 터주시니 나영으로선 반가운 기회였다. 모닝커피 타임을 가지며 말을 꺼내면 덜 어색할 거야. 그렇게 생각한 나영은 태주의 호의를 기쁘게 받아들였다. 저는 설탕만 넣어서 부탁드릴게요. 감사해요, 반장님.

 

  잠시 후, 태주가 커피를 내왔고 둘은 응접용 소파와 테이블에 마주 앉아 서로의 잔을 들었다. 커피 향기가 둘 사이를 감돈다. 나영은 이런 시간으로 하루를 여는 게 꽤 괜찮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도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말없이 잔을 내려놓는 태주가 어색하게 느껴져 잠시 눈치를 봤다. 나영도 따라 커피를 한 모금. 그리고 손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두었다가. 시침 소리가 이렇게 컸던가, 할 때 쯤 먼저 침묵을 깨뜨리자 생각하고 입을 연다.

 

  "저…"

 

  "…그"

 

  공교롭게도 타이밍이 겹쳤다. 아… 나영의 당황한 듯한 탄성이 잠시 허공을 맴돌았다. 반장님 먼저 말씀하세요. 아닙니다, 윤 순경이 편하게 말해요. 반장님이… 아뇨. 윤 순경이… 의미 없는 실랑이가 벌어졌다가, 잠시 또 정적이 찾아온다. 이번엔 초침 소리가 느껴질 정도의 적막이었다. 나영은 차라리 저가 먼저 말해야겠다 싶어 다시 입술을 열었다. 꼭 전해야 했고 전하고 싶은 말이었다. 며칠 전부터 태주에게 전하고 싶었던 말. 그건 바로 반장님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말이었다.

 

  "반장님. …반장님이 도와주셨으면 하는 일이 있어요."

 

  ***

 

  "반장님."

 

  태주는 정적을 비집고 저를 부르는 나영의 목소리에 한참이나 어떻게 말을 꺼낼지 고민하던 것을 멈추고 시선을 나영에게 두었다. 시간이 괜찮으면 퇴근 후에 잠시 만날 수 있을까요. 휴일에 뭐해요, 시간 괜찮으면 잠시 시간 좀 내줄래요. 내뱉지 못한 단어들이 나영의 부름 한 번에 공중으로 붕 떠올라 사라졌다. 나영의 용건이 끝나면 자연스럽게 말해야지. 그러나 이어지는 나영의 말이 그를 흔들어놓았기 때문에, 태주는 자연스러울 수 없었다.  

 

  "반장님이 도와주셨으면 하는 일이 있어요."

 

  도움이 필요하단 의외의 말에 태주는 다소 놀란 눈으로 나영을 바라봤다. 항상 밝게 웃으며 살뜰히 3반을 챙기던 나영이 도와달라는 말을 했다. 놀랄 만한 일이었다. 놀란 태주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영은 태연히 말을 이어갔다.

 

  "요즘 제가 고민이 하나 있는데요. 이런 적은 처음이라. …반장님이 좀 도와주셨으면 해요. 그러니까, 상담해주셨으면 해서요. 그렇게 큰일은 아니라 부담 느끼실 필요는 없구요. 그냥, 제 개인적인 일이에요. 그치만 꼭 도와주셨으면 해요."

 

  무엇이든 돕지 않을 수가 있을까. 저를 수없이 구하고 도운 나영인데. 무슨 일이에요, 윤 순경. 태주는 걱정이 묻어나는 말투로 나영을 돕고 싶다 말했다. 큰일이 아니더라도 나영이 고민한다는 것이 저를 걱정하게 만든다.

 

  "…여기서 말씀드리기는 곤란한 문제라 혹시 괜찮으시면 내일 퇴근 후에 시간 내주실 수 있을까요? 그 때 더 자세히 말씀 드릴게요."

 

  나영의 고민에 자신이 도움을 줄 수 있길 바라던 태주는, 여기서 말하기 껄끄러운 주제라는 나영의 말에 쉬이 납득했다. 고민거리를 이야기하기에 장소도 시간도 적절하진 않았으니까. 어차피 자신이 할 이야기도 사적인 성격의 것이었으니. 따로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나영에게도 자신에게도 옳았다. 물론 자신의 예상과는 조금 다른 성격의 자리이긴 했다. 이런 상황은 좋지 않을 것도 같았으나, 자신은 담백하게 말할 생각이었기에 자연스러운 분위기가 만들어진다면 담백하게 사실을 전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태주는 내일의 각오를 어느 정도는 다지기로 했다.

 

  내일 퇴근 후 두 시간 정도 뒤에 만날까요? 인성상회에서 기다릴게요. 나영의 말에 태주는 그래요, 말하고 커피를 다시 홀짝 마시기 시작했다.

 

  "아, 반장님. 하실 말씀 있다고 하셨는데…"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일 같이 이야기 하면 될 것 같네요."

 

  네에. 나영은 왠지 모르게 긴장하는 기색을 내비쳤다. 제법 어려운 말을 꺼내준 거구나. 태주는 나영이 자신을 상당히 의지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느 정도는 유의미한 일이지 않을까. 긍정적이다. 태주가 그렇게 긍정적으로 상황을 낙관하고 있을 때였다.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인 듯한 시점에 남식이 출근해 인사를 건넸다.

 

  "반장님, 윤 순경님.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어쩐 일로 반장님이 쫌 빨리 오셨네요? 항상 제가 이 등이었는데… 아, 커피타임 가지셨습니까. 모닝커피 저도 한잔 때려야겠네요!"

 

  남식의 등장에 분위기가 한결 가벼워졌다. 왔어요. 태주는 부드럽게 인사를 건네며 나영을 흘깃 바라보았다. 그리고 낙관적이기만 하던 전망에 먹구름이 끼는 것을 느꼈다. 남식이 등장하자 나영이 동요했기 때문이었다. 오셨어요. 아, 커피 제가 금방 타올게요. 남식이 오자마자 쭈뼛대던 나영은 그렇게 말하며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고는 남식 근처로 가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 남식 앞에 선 나영의 귀가 빨갛게 물들어있었다. 태주는 혹시 이게 나영이 도움을 요청한 일이 아닐까 하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

 

  바깥 하늘이 푸르게 물들며 어둑해진 시간. 귀가를 마친 태주는 들어선 방의 불을 일부러 켜지 않았다. 불 꺼진 방안으로 수백의 마을 불빛들이 스며들어 방안은 사물의 식별이 가능할 정도로 어둡지 않았다. 그는 가로등의 주황 불빛으로 물든 시계를 괜스레 보았다 힘없이 재킷을 벗어 옷걸이에 걸었다. 나영과의 약속시간까지 한 시간 반. 그녀와의 약속인데도 별로 달갑지가 않다. 태주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어제의 일이 떠올랐다. '이런 적은 처음이라서요.', '개인적인 일', '상담해주셨으면 해서요.'… 나영의 말들이 기억을 스쳐지나간다. 남식의 앞에서 수줍어하는 모습과 붉어진 귓바퀴도 기억을 지나친다. 기억을 더 되감아보면 인성상회의 네온불 아래 함께였던 두 사람이 떠오른다.

 

  태주는 인정하기로 했다. 나영이 저를 불러낸 이유는, 연애상담일 확률이 높다는 걸. 남식과의 관계에 있어 고민이 되는 부분들이 있겠지. 그런 걸 털어놓을 수 있는 상대가 자신이었을 뿐이다. 그런 신뢰를 받고 있는 셈이다. 그것이 나영이 태주를 만나는 논리적으로 납득 가능한 이유였다. 퇴근 후 같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직장 동료. 자신의 이야기였구나. 그랬구나. …지금은 마음을 가다듬는 게 필요했다. 태주는 눈을 감고 벽에 등을 기댔다. 같은 마음을 바랐던 적은 없으나 언젠가 같은 마음이 될 일말의 희망이 있기를 바랐다. 그렇지만 저가 품은 열정은 어울리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어울리고 말고를 떠나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다 끝난 걸. …나가지 말까. 잠시 고민했으나 태주는 나영의 신뢰를 배신할 수 없었다. 자신을 믿고 의지해준 그 순수한 믿음에 부응하고 싶었다. 바보 같지만 말이다. 약속시간이 다가오자 결국 그는 벗어둔 재킷을 다시 챙겨 입고 약속장소로 향했다. 전할 수 없는 마음이어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할 작정이었다.

 

  인성상회의 간판이 그날 밤처럼 빛났다. 왜 매번 같은 장소로 돌아오는지 모르겠으나 마음이 담담하게 정리된 태주는 오히려 잔인하게도 이곳이라 더 초연해져버렸다. 망설이지도 않고 들어선다. 내부로 들어서자 안쪽 테이블에 다소곳이 앉아있는 나영이 자신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고 있었다. 반장님, 이쪽이에요.

 

  "조금 늦었네요. 미안해요."

 

  "아니에요. 딱 좋을 때 오셨어요."

 

  부드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맞아주는 나영에 심장이 따끔거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문 아랫입술에 힘이 조금 들어갔다.

 

  "우선은… 술 한 병 시킬까요, 반장님? 한 잔 하면서 말씀드려야 좋을 것 같아서요."

 

  "그래요. 윤 순경 편한 대로 해요."

 

  자신은 한 잔 이상은 입에도 안 대겠지만. 취기는 사람을 종잡을 수 없게 만드니까. 나영이 주인 양씨에게 소주 한 병과 물을 주문하고 나자 둘 사이에 잠깐의 침묵이 찾아왔다. 나영이 이야기를 하고자 불렀으니 태주는 그저 편하게 말해도 좋아요. 그렇게만 말하고 입을 다물었기 때문이다. 주저하던 나영은 곧 대화의 포문을 열었다.

 

  "반장님. 오늘 제가 반장님 기분을 언짢게 해도 너그러이 이해해주셨으면 해요. 아셨죠?"

 

  "제가 윤 순경한테 언짢을 일이 뭐가 있겠어요. 미리 걱정 말고 이야기해도 좋아요."

 

  아마도 윤 순경한테 언짢을 리는 없고 조 경장한테 언짢을 리는 있을 것 같은데, 그건 그래도 되는 거겠죠. 그 정도는 윤 순경이 너그러이 이해해줬으면 좋겠네요. 태주는 남식이 고까운 마음을 속으로 삼키며 나영의 말을 경청했다.

 

  "그러니까, 사실 제 고민은 … 앞으로 어떻게 해야 대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는 거예요."

 

  조 경장을 말입니까. 되묻고 싶었지만 굳이 자신의 입 밖으로 둘 사이를 꺼내고 싶진 않았다. 그럴 만도 하지 않을까. 직장동료로 만나 사내에서 연인이 된 셈이니. 사내커플에게 처세에 있어서 어려움을 겪는 건 왕왕 있는 일이다. 둘 사이도 그렇지만, 비밀연애를 모르는 상사들이 종종 곤란한 일을 만들기도 하고. …그렇다고는 해도 윤 순경이 이런 고민을 하게 만들다니. 조 경장은 교제에 있어서는 미덥지 못한 스타일인가.

 

  "그럴 때는 늘 그랬듯 한결같이 전처럼 대하는 게 상책이지 않을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냥 모르는 척 하세요."

 

  "…네? 아, 네. 그리고 또…"

 

  각오는 하고 왔지만 왜 이런 조언을 자신이 하고 있는 건지. 들어주는 게 가장 좋은 상담법인 걸 알지만 태주는 듣고 있자니 제 속이 쓰릴 것 같아 그답지 않게 단호히 조언을 내놓았다. 술은 언제쯤 나오는 걸까. 당장이라도 한 잔 들이키고 싶은 심정이다. 씁쓸했다. 그런 속도 모르고 나영의 이야기는 아직 많이 남았다는 양 이제 시동을 걸고 있었다.

 

  나영을 여러모로 고민하게 하다니. 조 경장… 정말이지. 다음엔 기록지 다시 작성해오라는 것 말고 다른 소심한 복수를 계획해볼까. 나영의 고민 가득한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조 경장을 어떻게 혼내줄까. 반은 진심으로 벼르고 있으니, 나영이 눈을 마주쳐 웃어 보인다. 제 속내를 들키기라도 한 듯 머쓱해져 마른세수를 한번.

 

  "좋아해주실지도 확실치 않네요. 좋아해주셨으면 좋겠는데."

 

  조 경장이 윤 순경한테 그런 확신 하나 못 주면 어떻게 합니까. 평소에는 그렇게 강아지처럼 갸륵하게 굴더니. 윤 순경 앞에서는 없는 꼬리도 보이겠던데. 정작 윤 순경은 상대가 자신을 좋아할 거라는 확신도 없고. …자신이었다면 좀 달랐을 텐데. 미련이 덕지덕지 눌은 게 자신이 보기에도 한심하다. 마음을 감춘 채 나영의 말에 대답했다.

 

  "좋아합니다.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좋아할 거라는 말이었어요."

 

  말실수가 아주 자연스레 흘러나오지. 한태주. 하마터면 큰일 날 뻔 했다. 금방 둘러댔기에 망정이지. 보이지 않게 이를 악물었다. 그런 그의 대답에 나영은 조금 놀란 듯 태주를 쳐다보았다.

 

  "반장님. 혹시 다 알고 계신 건 아니죠?"

 

  "예?"

 

  무엇을? …남식과 나영의 사이를 말하는 거였다면, 모른 척 하고 싶어도 모를 수 없었다. 태주는 말없이 나영을 바라보기만 했다.

 

  "저 여태까지 비밀로 해왔는데요.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

 

  게임 셋이다. 기다렸지만 기다리지 않은 말이 이제 그녀의 입에서 나올 참이었다. 그녀의 한 마디 말이 둘의 비밀스러웠던 사이를 판사가 판결을 내리듯 못 박을 터였다.

 

  "반장님, 저 사실은 반장님을 계속 속여 왔거든요. 그래선 안 되는 거였는데.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계속 속이지 그랬어요. 차라리 내가 몰랐더라면. 더 늦게 알아서 이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만큼 늦게 알았더라면. 아니. 차라리 제 스스로 제 마음을 알지 못했더라면. 모른 척 했더라면. 무시했더라면. 억누를 수 있었다면. 그러나 지난 과거에 만약이란 없었고, 자신의 현재는 선고를 기다리는 죄인의 처지와 같았다.

 

  "…이해합니다. 윤 순경이 어쩔 수 없었을 거란 거."

 

  하지만 받아들일 자신은 없지. 그런 사람이다. 자신은.

 

  "반장님. 실은…"

 

  다가오지 않았어야 할 순간을 목전에 두고 태주는 열심히 생각했다. 저 말이 끝나면 자신은 뭐라고 해야 할까. 몰랐던 척 축하해요. 잘 됐네요. 그런 말들? 혹은 이미 알고 있었다고 같잖은 여유를 부리는 말들? 말과 말 사이의 틈은 길었다. 한없이 길었다. 그 간극 사이에서 태주는 전자를 택하기로 했다. 알고 있었노라 말하는 자신의 얼굴이 가면처럼 벗겨질까 두려웠기에. 나영이 조금 더 뜸을 들이며 말을 더 잇지 않고 있을 때, 태주는 스스로를 다잡고 겨우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말이 어울린 진 모르겠지만, 축하합니다. 조 경장과―"

  

  그리고 뒷말을 잇기 전 갑작스레 양씨가 소반에 소주와 김치, 소주잔들을 들고 테이블로 왔다. 그 탓에 태주의 말도, 나영의 말도 끊어졌다.

  

  "축하드려요, 한 반장님. 근데 왜 소주만 시키셨어요. 안주도 좀 시키고 그러시지. 아무튼 주문하신 소주 나왔습니다."

"…예? 그게 무슨…"

 

  무거운 분위기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이 양씨의 입에서 나와 태주는 당황을 했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축하라니. 저가 할 말을 가로챈 듯한 양씨의 말에 영문도 모른 채 황망해진 태주는 그를 올려다보며 물으려 했다. 그러나 문장이 채 끝을 맺기도 전에 또 다른 돌발 상황이 찾아왔다. 양씨의 뒤로 한 사람의 인영이 튀어나와 테이블로 다가왔다. 이건 또 무슨… 그리고 그 인영은 태주가 아주 잘 아는 사람의 것이었다.

 

  "…그리고 남식이도 나왔습니다! 반장님! 콩그레츄레이션! 콩그레츄레이션!"

 

  남식이었다. 양씨를 가림막으로 숨어 살금살금 다가온 주문한 적도 없는 남식이 튀어나왔다. 남식의 모습은 태주를 더 당황하게 만들었다. 남식은 귀엽고 우스꽝스러운 고깔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차림 그대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런 남식과 타이밍을 맞추어 잔잔한 노래를 재생하던 레코드의 음악이 갑자기 바뀌어, 익숙한 전주가 흘러나왔다.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노래인데. 전 세계 만국 공통으로 특정한 날이면 들을 수 있는 이 노래. 바로 생일 축하 노래였다. 그랬다. 양씨가 곧장 판을 바꾼 레코드 전축에서 생일 축하 노래가 흘러나왔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당신의 생일 축하합니다―.

 

  "…"

 

  갑자기 분위기가 생일이 되자 태주는 특유의 이지를 잃고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이걸로 돌발 상황이 끝나지 않았다. 왠지 태주는 다음 상황을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제 또 익숙한 얼굴들이 차례로 나올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 기대를 배신하지 않고 주방 쪽에서 고깔 부분이 조금 찌그러진 고무줄 모자를 쓴 용기가 큼지막한 생크림 케이크에 촛불을 붙여 등장했다. 짜잔, 써어프라이즈. 과장된 액션으로 높은 텐션을 선보이는 용기는 모자도 그렇고 행색을 보아하니 하기 싫다고 내빼다가 동철에게 가벼운 린치를 당한 눈치였다. 그런 용기의 뒤로 동철이 주방문에 기대서서 짝다리를 짚은 삐딱한 자세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다 알고 있었다는 듯.

 

  어떻게 된 일인지 빠르게 상황을 살피던 태주는 그제야 깨달았다. 오늘이 바로 자신의 생일이라는 사실을. 2018년을 살다온 사회인 태주에게 생일날이란 그렇게 중요한 날도 아니었다. 일 때문에 바빠 건너뛰기 일쑤였다. 별로 의미는 없는 그냥, 그런 날이었는데. 그래서 잊고 있었는데. 지금은 그게 너무 어이가 없었다. 자신의 생일인지도 몰랐구나. 그 정도로 정신이 없었구나.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럼 자신을 속이고 있었다는 게… 태주는 마주 앉은 나영에게로 다시 시선을 돌렸고 나영은 제 눈치를 살피며 환하게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죄송해요, 반장님. 거짓말 한다고 힘들어 죽는 줄 알았어요. 그래도… 이해해주시기로 약속하셨어요. 허탈함과 왠지 모를 안도감에 태주는 고개를 떨어뜨리고 숨을 들이켰다.

 

  "하. 다들 제 생일이라고 몰래 준비하신 겁니까?"

 

  "어. 서울놈 생일이라길래 우리 식구 된 기념이기도 하고 막내들이 우리 반장 생일인데 뭐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해서 물밑 작업 좀 해봤지. 한태주. 깜빡 속았냐?"

 

  언제 이런 걸 준비했답니까. 아무렇지 않게 말하려던 태주는 순간 가슴 속에서 먹먹함이 밀려와 입을 가만히 다물었다. 이곳을 택한 자신에 대한 확신을 다시금 얻은 순간이었다. 틀리지 않았다. 역시나, 이곳이 자신의 행복이었다. 자신에게 와 닿는 이들의 다정함이 따뜻하기만 하다. 그리고 소중하기만 하다. 이 사람들이 아니었으면 자신은 오늘의 의미를 여상히 넘긴 채 여느 날과 다를 바 없는 하루를 쓸쓸하게 보냈을 것이다. 소중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어찌 보면 자신보다 자신을 더 소중히 여겨주는 사람들인데. 그들이 있기에 내가 여기 있고, 내가 여기 있음으로써 행복이 비로소 무엇인지 알 수 있게 되었다.

 

  "고맙습니다."

 

  태주를 주목하고 있던 모두는 그의 반응이 예상과는 크게 달랐던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와. 반장님이 억수로 감동 받으셨나봅니다. 고맙다는 말에 진심이 엄청 담겨있는데요. 크. 반장님도 진짜 몰랐지요? 강 계장님이랑 이 형사님이랑 윤 순경님이랑 저랑 고생 마이 했습니다. 특히 이 형사님이 연기를 쫌 못하셔가…"

 

  남식이 분위기를 타서 입을 놀렸다. 뭐 인마. 내가 얼굴만 괜찮았으면 당장 배우 했을 연기력인데, 어디서. 용기가 그걸 순발력 있게 받아쳤고. 둘의 투닥거림에 삽시간에 다시 분위기가 왁자지껄 해졌다.

 

  "저, 우선 초부터 꺼야 하지 않을까요? 초 다 타겠어요."

 

  어수선한 분위기를 나영이 조목조목 지적하며 다시 스포트라이트를 오늘의 주인공에게로 돌렸다.

 

  "어, 그렇지. 할 건 하고 판 벌여야지. 한태주, 뭐해. 초 빨리 불어."

 

  "아, 반장님. 초 끄기 전에 소원 비셔야 돼요. 아시죠?"

 

  "아유, 반장님. 팔 아픕니다."

 

  태주는 모두의 얼굴을 한 번씩 바라보았다. 잊고 싶지 않은 추억들이 이렇게 쌓여간다. 태주의 입가에 미소가 절로 그려지며, 그는 촛불을 어색하게 후 불어 꺼뜨렸다. 주황빛 아른거리는 불빛들이 예쁘게 춤추다 연기를 태우며 사라졌다. 동시에 박수소리가 인성상회를 가득 메웠다. 생일 축하드립니다, 반장님. 각자의 목소리도 우렁차게 실내를 메웠다. 용기가 테이블에 케이크를 내려놓고 다들 자연스레 자리에 착석했다. 동철이 양씨에게 추가로 술과 안주를 더 주문하는 동안 남식이 태주에게 말을 걸어왔다.

 

  "와, 반장님. 근데 어머님께서 지인짜로 고생 많이 하셨겠어요. 여름 내내 반장님 태중에 데리고 계시느라 억수로 더우셨을 거 같은데. 오늘도 진짜 덥데요. 케이크 사오는데 생크림 다 녹는 줄 알았어요."

 

  태주는 옆에서 제 어머니까지 걱정하는 남식의 모습에 홀로 품었던 적의를 내려놓았다. 나는 왜 질투를 했던 걸까. 옆에서 조잘대는 남식이 그저 귀엽기만 하다.

 

  "아, 그러고 보니 윤 순경님도 고생 많이 하셨는데. 반장님 어떻게 불러내지 하다가 계장님이 윤 순경님한테 미션이라고 꼭 윤 순경님이 모셔와야 한다고 그러셨거든요. 윤 순경님 말이라면 분명히 반장님 오실 거라면서. 그런가 했는데 진짜 그랬네요. 덕분에 작전 성공했어요."

 

  "…아, 쑥스럽네요. 별로 한 건 없는데. …그래도 거짓말이 좀 어렵긴 하더라구요."

 

  …너구리같은 계장. 그와 별개로 아까는 경황이 없어 맥을 가다듬지 못했지만, 자신이 지레 짐작한 것과는 달리 남식과 나영이 아무런 사이가 아니라는 이 상황을 되짚어보자니 안도감이 들었다. 나영을 바라본다. 괜한 기우에 더 어렵게 만든 건 아닌가 싶었다. 나영이 자신을 불러낸 이유는 서프라이즈 때문이었지만 정말로 고민이나 이야기 하고 싶은 게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태주는 마음을 편히 먹고 다음에 정말로 이야기를 나눠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조금 시간이 지나고, 생일파티 겸 회식에 빠질 수 없는 술이 존재감을 뽐내며 등장했다. 용기와 남식이 잔을 착착 준비하고 술을 따랐다.

 

  "준비 다 됐지. 좋아, 그러면 건배하자. 서울놈 건배하기 전에 뭐 할 말 없냐. 한 마디 해."

 

  굳이 이런 건 안 해도 됐는데. 이런 걸 질색하는 한태주였다. 그래도 오늘은 분위기 상 내뺄 수는 없었다. 오늘은 자신이 주인공이었으니까. 목소리를 가다듬고 잔을 들고 태주는 일어났다.

 

  "…이렇게 저를 위해 자리를 마련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잊지 못할 추억이 또 하나 생겼네요. 앞으로도 잘 부탁합니다."

 

  간단하게 감사를 표하고 태주는 앉았다.

 

  "뭐야. 재미없게 시리… 그래도 짧은 거 하난 마음에 든다. 자, 그럼 진짜 건배하지. 한태주의 생일을 축하한다. 앞으로도 화목한 강력 3반을 위하여!"

 

  위하여―!

 

  그렇게 광란의 회식이 시작되었다.

 

  ***

 

  새벽까지 이어지는 회식은 한창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었다. 태주는 오늘의 주인공이라는 명목 때문에 평소보다 유달리 술을 많이 마시게 되었다. 술을 조금 깨야 할 필요성을 느낀 태주는 차가운 밤공기라도 마셔야겠다 싶어 인성상회 골목 바깥으로 나와 마을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시야가 탁 트인 도로벽에 기대어 섰다. 그리 차갑진 않지만 제법 선선한 밤공기가 상쾌했다. 알딸딸한 술기운에 열이 조금 올라서 그런지 시원했다. 마을을 내려다보면, 집들의 불은 다 꺼져있지만 아롱거리는 가로등 불빛이 보기 좋은 야경을 연출했다.

 

  오랜만에 들뜨는 밤. 태주는 방금 전까지 시끌시끌했던 자리를 하나씩 떠올려보기로 했다. 회식이 시작되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회식비를 걸고 내기를 하기도 했고. (물론 내기와는 상관없이 기분이 좋아졌던 그는 자신이 내기로 했다.) 양씨가 와서 서비스라고 따라준 인삼주를 더 내놓으라고 생떼를 부리는 계장님을 뜯어 말리기도 했다. …아까 나오기 전에는 가라오케에 다들 빠져서 박남정 노래를 따라 부르고 그랬는데. 지금쯤이면 다들 뻗어서 자는 와중에 이 형사가 블루스 타임이랍시고 발라드를 부르고 있을까.

 

  그런 생각들을 하자니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온다. 참 재밌지. 우리 3반 사람들. 혼잣말처럼 내뱉은 말이었다. 그런데 자신의 말에 대답하는 목소리가 귓가에 웅웅 들린다. 응, 그러네. 익숙한 목소리, 어느 샌가 자신의 옆에 서현이가 서있다. 술에 취해 헛것을 보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술이 기억을 불러일으키니까. 더 먼 곳의 기억을 불러왔을는지도. 당신, 나 없이도 되게 행복해 보인다. 내가 그립진 않아? 섭섭하다는 양 목소리가 말을 걸어온다. …아주 안 그리운 건 아니야. 그러면 나 보러 와야지. 내가 당신 얼마나 보고 싶어 하는데. 태주는 선뜻 대답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말이 끊기지는 않는다. …난 여기가 좋아. 당신도 좋고, 어머니도, 고모도, 내가 두고 온 것들도 좋지만. 난 이 동네도 그렇고, 저 사람들도 그렇고. 이곳에서의 시간들을 놓지 못해. 매정하게 들릴 수 있는 그의 말에 목소리는 웃는다. 그렇게 좋아? 당신 참 좋아 보인다. 정말로. 이제 그럼 당신은 행복한 거네? 그렇지. 그러면 이제 걱정 안 해도 되겠다. 잘 지내, 태주 씨. 응. 그럴게, 서현이 너도 잘 지내. 이제 그만 가야겠다. 그런데 태주 씨, 저 사람은 누구야? 좋아하는 사람? …뭐? 놀란 듯 고개 돌려 옆을 보면 아무도 없이 그는 혼자였다. 그리고 느껴지는 인기척에 뒤를 돌아보면 저와 마찬가지로 골목을 빠져나온 나영이 서있다.

 

  "윤 순경?"

 

  "반장님. 여기 계셨네요."

 

  자신을 꽤 찾아다닌 건지 그러지 않아도 발그레한 볼에 혈기가 돌았다. 자신을 찾으러 일부러 골목을 돌아다닌 걸까. 가만히 선 태주의 곁으로 나영이 다가선다.

 

  "와. 새벽에 오니까 엄청 조용하고 색다르네요. 전망이 너어무 좋아요. 바람 쐬기 딱인데요?"

 

  도로벽 너머를 바라보는 나영은 취기가 올라 그런지, 분위기에 취해 그런지 모르겠지만 거리감을 한 꺼풀 벗어던진 모습이었다. 생기 넘치는 미소가 다시 태주를 마주한다.

 

  "요즘 반장님을 보면 이곳을 좋아하게 되신 건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어떠세요, 반장님? 여기가 좀 좋아지셨어요?"

 

  많이요. 떠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질문에 대답하려는 찰나, 나영이 그렇지 참. 하고 빠르게 말을 돌린다. 굳이 대답이 필요 없었던 질문인 듯하다.

 

  "반장님. 생일 다시 한 번 축하드려요. …열두시가 지나서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요. 직접 전하고 싶었어요."

 

  열두시가 지나면 마법이 풀린다는 동화 속 공주가 떠올랐다. 어제는 참 마법 같은 날이었다. 자신의 생일이 이미 끝난 지 오래였음에도 제게 걸린 마법은 아직 풀리지 않은 듯 했지만. 아직 제 곁에 요정 같은 눈을 하고 서있는 나영이 있어 자신은 그렇게 아쉽지 않았다. 이미 충분했다. 받은 것이 많았다. 어제도, 그리고 오늘도.

 

  "고마워요. 모두들 덕에 특별한 생일이 됐습니다."

 

  몇 번이나 고마움을 표해도 모자랄 정도였다. 따스함이 이 새벽 속에 잔잔하게 깃든다. 이 시간도 특별하다. 태주는 애정 어린 눈길로 나영을 바라보았다. 나영은 왜인지 장난스러운 기대가 묻어나는 표정으로 태주에게 아직도 특별함이 끝나지 않았다 말했다.

 

  "그걸로 만족하시면 안돼요. 아직 선물이 남아있거든요."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나영이 한 손을 뒤로 감추고 있다. 선물. 저걸 뜻하는 걸까. 나영이 제 등 뒤로 감춘 무언가를 관찰하듯 응시한다. 검은색 쇼핑백이 언뜻 보인다.

 

  "…선물 같은 거 없어도 괜찮습니다."

 

  이미 충분하다고 생각하는데. 이 이상은 과분한데요, 그렇게 말하면서 시선은 여전히 고정되어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계속 제 손만 보고 계신 건 아세요?"

 

  그랬나요, 너무 속보이네요. 옅은 웃음을 흘렸고. 그렇지만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지 않은가. 나영이 제게 주는 선물인데. 물론 그녀가 준비한 선물이 어떤 것이든 좋지 않을 리 없었지만.

 

  "선물해줘서 고마워요. 기쁘게 받겠습니다. …지금 뜯어봐도 괜찮습니까?"

 

  호기심을 참지 못한 태주가 조심스레 나영의 허락을 구했다. 나영은 흔쾌히 그래주세요, 하고 답했다. 나영이 오히려 지금 그가 확인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생각하던 차였다는 걸 그는 알지 못했지만.

 

  "그럼요. 지금 봐주셨으면 싶었어요."

 

  보고 실망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는데. 나영은 등 뒤로 감추어놓았던 쇼핑백을 천천히 태주에게 내밀었다. 태주는 제 앞에 내밀어진 그것을 받아들었다. 잠시 간 그걸 내려 보던 태주는 웃었다. 내용물이 보이지 않게 쇼핑백의 입구도 테이프로 꼭꼭 막아놓은 게 보였다. 다른 누군가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던 걸까? …귀엽다. 이 포장을 뜯기도 미안해졌는지 잠시 태주의 손이 주춤했지만 뜯겠습니다, 라는 말과 함께 태주는 살살 테이프를 뜯어 다음으로 안에 든 박스를 꺼내었다. 심플한 포장이 되어있는 직사각형 모양의 그리 두껍지 않은 까만 박스. 태주는 겉보기를 보아하니 의류 종류인가, 하고 짐작했다. 곧바로 박스를 개봉하는 태주의 손길에 나영은 침을 꿀꺽 삼켰다. 박스를 열어 그 안에 든 걸 본 태주의 표정이 이게 뭘까, 에서 알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바뀌어가는 게 나영의 눈에 보였다.

 

  태주는 받은 선물에 잠시 말을 넣어두고 그것을 감상했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넥타이였다. 짙은 남색 바탕에 정성이 돋보이는 무늬가 패턴을 이루고 있었다. 태주는 박스에서 넥타이를 꺼내어 포장들을 잠시 옆에 내려놓고 손으로 받쳐 들었다.

 

  "반장님이 마음에 들어 하실지 모르겠네요. 그래도 열심히 골라봤어요. 반장님 목이 종종 허전해보이더라구요. 깜빡하시는 건지 싫어하시는 건지 잘 모르지만. 잊지 마시라는 의미로요."

 

  선물을 하는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 나영은 선물을 사게 된 배경을 열심히 말했다. 선물을 받고 기뻐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에, 자신의 선물이 꽤 괜찮음을 어필함과 동시에. 그러면서 그녀는 부끄러워하는 것 같아 보였다.

 

  "이걸 직접 골랐어요?"

 

  기쁜 기색을 숨기지 않고, 태주가 깊어진 눈으로 나영에게 물었다. 자신의 사소한 일도 기억해주는 그 세심함과 호의에 태주는 순수하게 기뻤다.

 

  "그, 조 경장님이랑 같이 고르긴 했어요. 제가 남성용 물건 고르는 건 또 처음이라. "

 

  나영은 굳이 남식에게 도움을 청한 이유는 말하지 않았다. 어찌 말할 수 있을까. 생일이라는 좋은 명분으로 조금이라도 제 딴에 부족함 없는 선물을 주고 싶었다는 걸. …마음이 담긴 선물을 주고 싶었다는 걸. 그러기 위해서 의미가 숨어있는 물건으로 간접적으로 마음을 드러낼 선물을 하고 싶었는데. 동철은 나영의 그런 마음을 훤히 다 아는 듯해보여 말할 수 없었고, 용기는 태주의 취향과 다른 취향을 가진 듯해 도움을 구할 수 없었다. 남식이 그나마 가장 태주와 취향이 맞을 듯 해보였고 또, 들키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 예상에 맞게 남식은 큰 도움이 되었다. 딱히 제 의도를 의심하지도 않았다. 다만 뭐가 그렇게 좋은지 계속 싱글벙글이긴 했지만.

 

  "…그럼 혹시 조 경장이랑 같이 술 마셨을 때."

 

  태주는 그런 그녀의 말에 혹시나 제가 오해하고 있던 건 아닌지 하는 마음이 들었다. 물론 확신할 수는 없다.

 

  "그 때 보셨어요? 그럼 다 알고 계셨어요? 아. 들킨 건 아니었으려나…"

 

  나영은 그 자리를 봤다는 태주의 말에 횡설수설했다. 남식 덕분에 마음에 드는 선물을 골랐고, 그게 고마워 보답으로 그에게 술을 샀을 뿐인데 그걸 보셨다니. …아, 그 때 들킬 뻔 했네요. 하하. 인성상회를 괜히 갔네요. 그런데 반장님 그 때 왜 아는 척 안 하셨어요? 나영은 당황했는지 다소 과장된 듯 이런 저런 말을 하다 우연찮게 태주의 허를 찔렀다. 그 때.

 

  그 때는.

 

  "…방해하면 안 될 것 같았습니다."

 

  거기까지 말하는 태주의 뉘앙스가 넌지시 나영과 남식의 기류가 심상치 않았음을 알렸다. 정말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저는 그렇게 느꼈다고. 그래서 그랬노라고.

 

  "네? 아니, 그. 반장님. … 오해세요. 그런 거 아니에요."

 

  생각 외의 답변에 나영은 남식과 자신의 사이를 오해한 듯한 태주의 말을 재빨리 부정했다. 정말로 아니에요. 단호한 듯한 말. 나영은 남식과의 선을 확실히 그었다. 생각하시는 그런 사이 아니에요. 정말로. 오해의 여지가 없게끔 확신을 주는 나영의 말에, 넥타이를 손에 든 태주의 심장박동이 조금씩 빨라진다. 단순한 오해였구나. 태주는 갑자기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나영은 태주가 그런 오해를 하고 있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자신이 너무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일까. 여태까지 그렇게 생각하고 계셨을까. 불현듯 나영은 아까 상담의 낯을 한 대화를 떠올렸다. 그럼 그 조언이 그런 의미의 조언이었구나. 거기까지 생각한 나영은 무언가 결심한 듯 태주의 손에 들린 넥타이를 응시했다.

 

  "…반장님, 넥타이. 제가 매어 드려도 될까요? 반장님이 매신 거 지금 보고 싶어요."

 

  그렇게 말하며 나영은 태주의 손에 들린 넥타이를 가져갔다. 태주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으나 나영의 예고에 긴장했다. 나영은 넥타이를 매기 위해 태주에게 더 가까이 섰다. 숨결이 닿는 거리. 단숨에 다가선 나영의 향이 훅 끼쳐 태주는 아무 말도 못한 채 제 목을 감싸는 나영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넥타이를 목에 두르기 위해 팔을 두른 것뿐인데 제 목을 껴안은 것 같은 착각에 숨을 잠시 멈춘다.

 

  나영의 손은 느린 속도로 움직였다. 제 긴장이 들키지 않게 태주는 숨을 작게 내쉬며 호흡을 가다듬는다. 넥타이를 매는 것뿐인데, 시간이 꽤 길게 흐른 것 같다. 서로의 존재감이 너무 커 하나하나 느껴지기 때문일까. 나영은 넥타이를 묶어 밖으로 빼내고 마지막으로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셔츠 하나만 입어 허전했던 정장 차림이 넥타이를 매자 반듯해졌다.

 

  "잘 어울리세요. 멋있어요."

 

  목에 걸린 넥타이를 태주가 괜히 매만졌다. 방금까지 가까웠던 둘 사이의 거리를 한번 의식하자, 나영의 말씨나 손길, 눈빛 그리고 목소리, 그녀를 이루고 있는 모든 것이 저를 어지럽게 만든다. 쿵쿵대는 심장 때문에 입을 열면 입 밖으로 마음이 튀어나올 것 같다. 고개를 가만히 끄덕인다.

 

  "고마워요."

 

  그렇게 밖에 말하지 못했다. 밤바람이 간지럽다. 새벽녘에 가라앉은 공기가 다른 향으로 바뀌어간다. 둘을 감싼 기류가 묘하다.

 

   "…저, 반장님. 사실은요.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이 있는데요."

 

  나영은 다시 또 용기를 내어 말을 던졌다. 말하지 않으면 알 수 없다. 마음을 언어로 화해야 그가 자신을 알아줄 것이다.

 

  "넥타이를 선물하는 의미에 대해서 알고 계세요?"

 

  태주는 그 뜻을 알지 못했다. 기꺼이 그 뜻을 알고 싶어졌다. 반장님. 나영은 입 안에서 맴도는 말을 잠시 가다듬었다. 제가 반장님께 넥타이를 선물한 이유는…

 

  "선물하는 사람이 선물 받는 상대를… 가지고 싶다는 뜻이라고 해요."

 

  나영이 특유의 나긋한 목소리가 온 새벽을 울렸다. 어둠을 가로질러 그 말은 바람이 되어, 향기가 되어 태주에게로 날아가 꽂힌다.

 

  "가지고 싶다는 뜻이요. 반장님."

 

  "…좋아합니다."

 

  단단하게 울리는 나영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태주의 입에서 둑이 터지듯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내가 윤 순경을 좋아합니다."

 

  물처럼 밀려드는 마음을 한데 모아, 담아두기만 했던 여린 진심이 순식간에 제게서 쓸려나가 네게로 가 닿는다. 말의 마디마디가 달빛을 받는 물결이다. 당신이 투명하게 마음을 채우면 나의 고요함에 파문이 인다. 동심원을 그리는 말들이 무한이 한 곳으로 흐른다.

 

  "아까 오해했다고 그랬었죠. 윤 순경과 조 경장 사이를.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때, 나는 혼란스러웠어요. 그건 왜인지 알겠어요?"

 

  달빛을 받아 하얀 당신의 얼굴이 눈부시다. 그래, 언제나 당신은 눈이 부시다.

 

  "내가… 윤 순경을 원해서 그런 겁니다."

 

  태주는 숨을 들이쉬고 마저 말을 풀어내었다.

 

  "둘이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했을 때는,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이 자리가 나를 위한 자리여서. 그 때의 윤 순경과 조 경장이 만났던 이유도 다름 아닌 나라서."

 

  "…"

 

  "나도 모르는 욕심이 생겨요. 윤 순경 일에는."

 

  지금 당신에게 전하는 마음도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니까. 그게 이리도 애틋하니까.

 

  "내가 발령통지서를 찢었던 일 기억합니까? …떠나지 않겠다고 했었죠. 이곳이 좋아져서 그랬습니다. 그리고 이곳이 좋아진 이유 중 가장 크게 자리 잡은 게, …윤나영 순경 당신이에요."

 

  윤나영 순경, 당신이 나를 필사적으로 만듭니다. 그리고 그건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럴 겁니다. 이건 고백이에요. 윤나영 순경. 태주의 말이 조용히 끝을 맺었다. 둘 사이를 잠시 침묵이 스친다. 맞부딪힌 마음들이 빈 공간을 채운다. 그런 당신이었다. 그렇게 원한다. 두렵게도 품은 마음으로 당신을 원한다. 당신은 나를 얻고 싶다 말했다. 당신이 나를 얻으려면 이 마음들도 함께 손에 쥐어야 했다. 윤 순경, 잘 들어요. 윤 순경이 나를 원하는 마음이 나와 같나요. 나처럼 당신도 하루 끝에 당신을 찾나요. 자꾸만 곁을 찾게 되나요. 평온했던 마음이 어지럽게 산란하나요. 나도 모르는 열기에 내가 녹아가고, 마침내 끓어오르기 시작하나요. 나는 그래요. 나는 그렇습니다. 당신에게 한해서 그렇지 않던 내가 그렇게 되어갑니다.

 

  흔들리는 새벽이 불빛을 비춘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어느 길 위에 서있다. 남자는 모든 걸 내보였다. 둘은 한참이나 말이 없다. 그러나 많은 말은 필요 없다.

 

  마침내 진심을 고스란히 바치자 일순 자신을 껴안는 온기가 느껴진다. 그 온기는 편안하고 따뜻하고, 저를 흘러내리게 만든다. 품을 파고드는 이 온기를 나는 놓고 싶지 않았다.

같은 마음이에요. 반장님.

 

  거둬져있던 나영의 손길이 넥타이를 스쳐 위로 올라간다. 두 팔로 자신의 목을 감는 게 느껴졌다. 이제는 둘 사이에 남은 거리가 정말 숨을 겹칠 정도다. 그리고 둘의 시선이 마주하면, 서로의 눈동자는 밤하늘의 그 어떤 별들보다 빛나고 있었다.

 

  좋아해요.

​​화성맨 김화석(@L1F3_0N_M4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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