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ici
가는 길
1988년에 머문지도 1년이 지났다. 다시 한 번 찾아온 무더운 여름에 태주는 봄에 산 반팔을 입었다. 여태까지는 보기만 해도 더운 정장을 입는데도 누구도 뭐라하지 않았지.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6월쯤 되니 남식이 말을 꺼냈다.
"반장님 안 더우세요?"
제가 마침내 이곳에 속하게 되었다. 주변 사람들과 같은 속도로 늙어갈 것이라는 증거이기도 했다. 태주는 그날 밤, 독한 소주 몇 병과 오징어를 물어 뜯으며 울었다. 술 먹으면서 우는 일 따위 해본 적 없는데, 슬픔이 아닌 무언가가 태주의 마음 속을 자꾸 찔러댔다. 화려한 도시의 조명보다 낡은 등불이 더 익숙해지는 불편함처럼.
*
1년 사이 크고 작은 일이 있었다. 가장 큰 일이라고 한다면, 강동철 계장. 한동안 계장실 근처는 조용했었다. 인성은 시골 마을이고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소문이 금방 난다.
강동철이 이혼했다. 이유는 흔한 성격차이로.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인생사는 비슷했다. 큰 일이긴 했다. 이혼한 뒤 강동철이 태주에게 고백해왔기에. 자신을 좋아한다고. 좋아한다는 말 뒤에는 덧붙여 사랑한다고.
세상이 인과관계에 따라 돌아가진 않지만 얼추 맞을 때가 있다. 그의 이혼 원인은 무엇일까. 그건 한태주와 강동철과 잤다인지 한태주가 강동철을 지나치게 믿어버려서인지.
*
작은 일이라고 한다면, 동철은 더 이상 잘 때 양말을 신지 않는다.
*
"반장님, 생일…"
나영의 한 마디에 남식과 용기가 더 들떴다. 태주를 히어로 보 듯 하는 남식에게도 이제는 꼬박꼬박 반장님이라고 태주를 높여주는 용기에게도 그냥 지나치기는 아쉬운 날이었다. 오늘 한 잔 해야하는 거 아닙니까? 하고 둘이 장단을 맞추고 나영마저 태주에게 동의하는 눈짓을 보내니 이길 재간이 없었다.
"한태주, 넌 어떠냐."
동철의 말투가 이상했다. 꼭 안 괜찮다고 하라는 듯 부루퉁했다.
"괜찮습니다. 끝나고 가시죠. 제가 한 턱 내겠습니다."
생일에 별 의미는 없다. 아. 오히려 마음이 아프다. 자꾸 애써 누르려는 어머니의 애절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태주의 말에 강력반이 떠들썩해진다. 어수선한 틈새로 동철의 눈빛이 날카롭게 꽂혀온다. 쭉 이랬다. 이혼 소식을 들은 이후로 동철은 자신을 저렇게 본다. 섹스를 할 때는 오히려 봐주지도 않으면서 저랬다.
*
"한태주, 한태주."
낮은 음성. 뺨을 감싸는 두꺼운 손. 의지할 수 있는 몸. 내가 좋아하는,
"태주야."
사람.
"집으로 가요."
살짝 꼬인 발음으로 태주가 말했다. 사택을 향하는 길을 가리키며 하는 술주정뱅이 말도 잘 들어준다, 서부서 멧돼지라는 분이. 큰 키의 자신을 업었는데도 동철은 흔들리지 않았다. 계단을 오를 때도 울퉁불퉁한 골목길을 걸을 때도. 꽉 잡을 필요가 없다. 불안해하지 않아도 돼. 이 사실이 얼마나 저를 불안하게 만드는지 이 사람은 알까.
*
이부자리를 깔아주고 가려는 동철을 붙잡은 건 태주였다. 동철은 술에 취한 사람을 덮칠 만큼의 몰상식한 인사는 아니었다. 뒤로 물러나려는 얼굴을 붙잡고 당장 숨이 넘어갈 것처럼 헐떡이며 입을 맞췄다. 얽히는 혀와 부딪히는 혀와 입술이 간절했다. 춥춥대는 마찰음이 고마웠다.
"사랑한다고…그런 거, 말씀 못 드립니다."
그렁그렁한 눈으로 그래봤자 상처 안 받는다고 해줘야할까.
"언제든지 헤어질 수 있어요."
동철의 손가락 뼈마다를 쥔 마른 손이 아팠다. 한태주 술 많이 먹으면 하얗게 질리는 구나.
"더 나아질 거란 생각도 마세요."
결국 뚝 떨어지는 눈물, 동철이 투박하게도 닦아줬다.
"알았어, 알았어."
서울식 고백은 무시무시하기도 해라.
얇은 몸을 토닥이는 박자를 따라 태주의 고개가 동철의 어깨로 툭 떨어졌다. 뜨거운 숨이 와닿았다. 이게, 여기가 중요한거지. 태주야,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하고 곰살맞게 묻고 싶어진다.
"생일 축하한다."
반쪽짜리 축하였다. 하지만 태주는 하아, 하고 큰 숨을 내쉬고 잠에 들었다. 안도한 듯 보였다고 동철은 마음대로 생각하기로 했다.
*
사랑하는 한태주, 생일 축하한다.
동철은 모자랐던 반을 더한 축하를 태주가 까무룩 잠들고 했다. 고운 이마에 입술을 맞붙이고.
cici(@cici0720)